주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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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흔'''(周昕, ? ~ [[197년]]?)은 [[중국]] [[후한]] 말의 정치가로, 자는 '''대명'''(大明)<ref name=a>《회계전록(會稽典錄)》</ref>이며 양주(揚州) 회계군(會稽郡) 사람이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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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 대명(大明)<ref nam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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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 ·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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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수도로 가 [[진번 (후한)|진번]](陳蕃)에게 사사하였으며, 책을 많이 읽었고 음률과 풍수지리에 밝았다. 태위부(太尉府)에 벽소(辟召 : 특채로 임용되는 것)되어 고제(高第)로 천거되었고, 승진하여 단양태수(丹陽太守)가 되었다.
단양태수(丹陽太守)를 지냈다.
 
[[원술]](袁術)이 회남(淮南)에 있었을 때, 주흔은 그의 야망과 악행을 증오하였기 때문에 왕래하지 않았다.
[[진번 (후한)|진번]](陳蕃)에게 사사하여 학문을 익혔으며 풍수지리에 밝았다.
 
[[조조]](曹操)가 병사를 일으켰을 때, 주흔은 전후로 조조에게 1만 명의 병력을 지원했다.
평소 [[원술]](袁術)의 야망과 악행을 증오하고 있었으므로 원술과는 험악한 관계였다. [[반동탁연합]](反董卓聯合)에서 활동할 무렵 [[조조]](曹操)에게 전후로 1만의 병력을 지원했다.
 
동생 [[주앙 (후한)|주앙]](周昂) · [[주우]](周喁)와 같이 [[원소 (삼국지)|원소]](袁紹)를 따르며 원술을 견제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원술이 손견을 앞세워 낙양(洛陽)까지 진출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원소는 주씨 형제를 이용해 원술을 쳤고 마침내 이들이 손견을 격파하며 원술군의 주요 전진기지인 양성(襄城)을 탈취하였다. 결국 원술은 [[동탁]](董卓)과의 싸움을 포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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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부덕한 것이 죄일 뿐, 백성들은 무슨 허물이 있어 핍박하는가!"'''
 
라고 말하며 크게 탄식한 후, 자진하여 군사를 해산시키고 고향으로단양으로 돌아갔다.
 
[[건안]](建安) 2년([[197년]]), [[손책]](孫策)이 회계군을 침공했을때 [[왕랑]](王朗)과 함께 이에 맞서다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