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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ilthey1-4.jpg|thumb|right|빌헬름 딜타이]]
 
'''빌헬름 딜타이''' ('''Wilhelm Dilthey''';, [[1833년]] [[11월 19일]] ~ [[1911년]] [[10월 1일]])는 [[독일]]의 역사학자이자 심리학자이고, 해석과 의미에 대한 연구를 하는 [[해석학 (철학)|해석학]] 연구자이고 [[철학자]]이다. 그는 그간 경시되어 온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 연구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그들은 [[독일 낭만주의]]운동의 일부이자 [[경험주의|경험주의자]]의 일부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의 경험주의적 작업은 중심적인 인식론적 가설의 측면에서 영국 경험주의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연과학에 대하여 정신 과학의 분야를 방법론적으로 확고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삶의 직접 체험에 바탕을 둔 '생의 철학'을 주창하여 창시자로 일컬어진다. 저서에 <기술적 분석적 심리학> <체험과 창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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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딜타이는 1833년 11월 19일에 독일 [[비스바덴]] 시의 비브리히(Biebrich)라는 마을에서 [[개신교]] [[칼뱅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딜타이는 비스바덴에서 김나지움을 다녔고, 졸업논문으로는 <희랍의 고대 문화가 젊은이들에게 미친 영향 연구(Über den Einfluß des griechischen Altertums auf die Jugend)>가 있다. 이후 부모의 권유로 하이델베르크 대학교(1852)에서 신학을 전공했고, 세 학기를 다닌 후 다시 베를린 대학교(1853)로 옮겨 역사학을 공부했다. [[칸트]],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레싱]], [[게르비누스]]의 [[철학]]과 [[역사]]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부모의 소망에 부응하기 위해 1856년에 신학 국가시험에 합격한 후 설교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국가 시행 교사 자격시험을 치러 합격한 이후 베를린 소재 한 김나지움에서 2년 정도 교편을 잡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건강 문제로 포기하게 된다. 이후 약 6년간을 딜타이는 역사 및 철학에 매진하게 된다.
 
이전의 사상가들 중 특히 베크(J. T. Beck)와 랑케(L. von Lanke), 트렌델렌부르크(F. A. Trendelenburg), 피셔(K. Fischer)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해석학의 입장에서 역사주의 철학을 발전시키는 일에 관심을 쏟았다. 대학에서는 [[교회사]], 원시 [[기독교]]에 대한 관심과 함께 그의 스승인 트렌델렌부르크에게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뵈크에게서는 [[문헌학]]을 수강하였다. 신학 분야 국가시험을 수석으로 졸업하였으나 지속적 학문과 생활의 안정을 위하여 김나지움 교사로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
 
[[1859년]] 슐라이어마허 재단의 현상 논문에 선정되면서 교사직을 사임하고 본격적으로 [[해석학 (철학)|해석학]]과 [[철학]]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딜타이는 1864년에 해석학의 선구자인 <슐라이어마허의 윤리학에 관한 연구>로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해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1865년 <도덕의식의 분석 시도>라는 연구로 교수 자격 논문이 통과되었다. 교수 자격 논문 통과 후 딜타이는 베를린 대학교 사강사가 된다. 그리고 1866년에는[[1866년]]에는 스위스의 바젤에서 교수직을 얻어 가르쳤다. 그 이후 다시 독일의 킬(1868∼1871), 그리고 브레슬라우(1871∼1882) 등으로 자리를 옮겨 교수 생활을 하다가 1882년에서 1905년까지는 루돌프 로체의 후임으로 베를린 대학교에서 교수직을 얻어 은퇴하기까지 가르쳤다. 이 교수직은 한때 헤겔이 재직했던 자리이기도 하다. [[1883년]] [[정신과학 입문]]을 출간하면서 정신적으로 가장 생산적인 순간을 맞게 된 딜타이는 브레슬라우 시절부터 교제해 오던 요르크 백작(Grafen Yorck)과의 우정을 더욱 돈독히 하게 되었다. 1874년에 푸트만(Katherine Puttmann)과 결혼해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베를린 대학]]에 정착한 후 딜타이의 삶에서 학자로서의 학문적 강의와 저술 이외에 그다지 특이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1887년 베를린 학술원 회원으로 임명된 후 칸트 전집의 출간에 공헌을 하였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후 딜타이의 대표적인 저술로는 1906년 ≪체험과 문학≫, 1907년 ≪철학의 본질≫, 1910년 ≪정신과학에서 정신세계의 구축≫ 등을 꼽을 수 있다. 딜타이는 1911년 10월 1일에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 걸쳐 있는 남(南)티롤 지방 슐레른 강변의 자이스(Seis)에서 병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