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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사상가들 중 특히 베크(J. T. Beck)와 랑케(L. von Lanke), 트렌델렌부르크(F. A. Trendelenburg), 피셔(K. Fischer)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해석학의 입장에서 역사주의 철학을 발전시키는 일에 관심을 쏟았다. 대학에서는 [[교회사]], 원시 [[기독교]]에 대한 관심과 함께 그의 스승인 트렌델렌부르크에게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뵈크에게서는 [[문헌학]]을 수강하였다. 신학 분야 국가시험을 수석으로 졸업하였으나 지속적 학문과 생활의 안정을 위하여 김나지움 교사로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
 
[[1859년]] 슐라이어마허 재단의 현상 논문에 선정되면서 교사직을 사임하고 본격적으로 [[해석학 (철학)|해석학]]과 [[철학]]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딜타이는 1864년에[[1864년]]에 해석학의 선구자인 <슐라이어마허의 윤리학에 관한 연구>로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해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1865년]] <도덕의식의 분석 시도>라는 연구로 교수 자격 논문이 통과되었다. 교수 자격 논문 통과 후 딜타이는 베를린 대학교 사강사가 된다. 그리고 [[1866년]]에는 스위스의 바젤에서 교수직을 얻어 가르쳤다. 그 이후 다시 독일의 킬(1868∼1871), 그리고 브레슬라우 등으로 자리를 옮겨 교수 생활을 하다가 1882년에서[[1882년]]에서 1905년까지는[[1905년]]까지는 루돌프 로체의 후임으로 베를린 대학교에서 교수직을 얻어 은퇴하기까지 가르쳤다. 이 교수직은 한때 헤겔이 재직했던 자리이기도 하다. [[1883년]] [[정신과학 입문]]을 출간하면서 정신적으로 가장 생산적인 순간을 맞게 된 딜타이는 브레슬라우 시절부터 교제해 오던 요르크 백작(Grafen Yorck)과의 우정을 더욱 돈독히 하게 되었다. 1874년에[[1874년]]에 푸트만(Katherine Puttmann)과 결혼해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베를린 대학]]에 정착한 후 딜타이의 삶에서 학자로서의 학문적 강의와 저술 이외에 그다지 특이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1887년 베를린 학술원 회원으로 임명된 후 칸트 전집의 출간에 공헌을 하였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후 딜타이의 대표적인 저술로는 [[1906년]] ≪체험과 문학≫, [[1907년]] ≪철학의 본질≫, [[1910년]] ≪정신과학에서 정신세계의 구축≫ 등을 꼽을 수 있다. 딜타이는 1911년 10월 1일에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 걸쳐 있는 남(南)티롤 지방 슐레른 강변의 자이스(Seis)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 사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