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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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에 대하여 ==
나헌의 이름은 「[[삼국지]]」의 기록에는 헌(憲)이라고 하는데, 「[[양양기]]」에서는 이름이 헌(獻)으로 표기되었다. 그런데 아마 [[배송지]]는 「삼국지」 본문과 일치시키기 위해 「양양기」의 헌(獻)을 고쳐 헌(憲)으로 고쳐 적었다고 한다.
== 초기 시절생애 ==
=== 초기 시절 ===
그의 아버지 [[나몽]](羅蒙)이 난을 피하여 [[파촉]]으로 피난을 왔는데, 관직이 광한태수(廣漢太守)에 이르렀다. 또한 [[나헌]]은 어려서 재능과 학문으로 이름이 알려져 13세에 문장을 짓기도 하였다.
=== 촉나라 장수 시절 ===
[[239년]], [[유선 (후주)|유선]](劉禪)이 장남 [[유선 (224년)|유선]](劉璿)을 황태자에 책봉 하였을때, 태사자인(太子舍人)에 취임하였고, 그 후, 서자(庶子), 상서이부랑(尙書吏部郎)으로 승진하였다. 선신교위(宣信校尉)로 올랐을때 [[오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는데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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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년]], [[위나라]]가 [[촉나라]]를 침략하자 염우는 중앙으로 소환되자, 자신은 군사 2000천여 명을 이끌고 영안을 지켰다. 그러나 유선이 [[등애]](鄧艾)에게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군사들을 이끌고 도정(都亭)에서 사흘동안 머물렀다.
=== 진나라 장수 시절 ===
[[264년]], 오의 장수 [[육항]](陸抗),[[보협]](步協),[[유평]](留平),[[성만]](盛曼)이 영안으로 쳐들어 오자, 참군 [[양종]](楊宗)을 [[진건]](陳騫)에게 위급함을 고하게 하였고, 문무관료의 인수를 정하고, 자신의 아들 [[나습]](羅習)을 볼모로 보냈다. 그러자 진건은 [[사마소|진왕]](晉王)에게 보고하였고, [[호열]](湖烈)의 원군이 도착할때까지 그들을 막아내고, [[위진|진나라]]에 투항하였고, 진왕은 그에게 영안을 계속 다스리게 하고, 능강장군(凌江將軍)에 임명하고 만년장후(萬年亭侯)로 봉했다. 또한 무릉의 4군이 [[오나라]]에 반기를 들자 무릉태수 파동감군(巴東監軍)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