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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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金正喜, [[1786년]] ~ [[1856년]])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서예가]]·[[금석학자]]·[[고증학자]]이다. [[본관]]은 [[경주 김씨|경주]], [[호 (이름)|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 등이다. [[한국]] [[금석학]]의 개조(開祖)로 여겨지며,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만든 [[추사체]]가 있다. 그는 또한 [[난초]]를 잘 그렸다.
 
== 생애 ==
==영조의 생애 병신화순옹주가 병신 병신출가한출가한 월성위 집안에서 태어난 김정희의 집안에는 대대로 명필이 많았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기계 유씨가 임신한 지 24개월 만에 출산했다는 전설이 있다.<ref name="글로벌"> 《[[글로벌세계대백과]]》, 〈서민예술〉, 김정희. </ref> 7세 때 입춘대길이라 쓴 글을 문앞에 붙여 놓으니 지나가던 [[채제공]]이 보고는 김정희에게 장차 명필이 되겠다고 칭찬했다고 한다.<ref name="조선인물실록"> 소준섭. 《조선인물실록 1》, 256~264쪽. </ref> 서얼 출신으로 시, 서, 화에 모두 능했던 [[박제가]]에게 어려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다가 큰아버지 [[김노영]]이 귀양 가고, 둘째 큰아버지 김노성, 할머니, 할아버지 등이 죽게 되었다. 그러자 가문을 이어야 한다는 집안의 뜻에 따라 김노영의 양자로 입적된 뒤 15세의 나이로 동갑인 [[한산 이씨]]와 혼인한다. 결혼하던 그해 정조가 승하하고([[1800년]]), 그의 증대고모뻘인 김대비([[정순왕후 (영조)|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그 연고로 친부인 [[김노경]]은 종3품까지 벼슬이 오른다. 그런데 이번에는 생모가 34세로 세상을 떠나자, 비탄과 허무감에 고향 예산으로 내려가 불교에 심취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