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행정 구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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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 기타 열국 ===
 
삼국시대에 초기부터 현 제도가 있었는데 이 현은 중국의 군현제의 영향으로 지금의 [[면 (행정 구역)|면]]처럼 대개 군(郡)의 부속고을로 지배되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검토하면 신라도 매우 초기부터 지배하고 있던 마을들에 현을 두었던 듯 하고<ref>삼국사기 파사이사금 5년조에 남신현(南新縣)이라는 마을 이름이 나온다. 위치는 불명. 그 외에도 이미 군이나 주(州)라는 행정단위 명칭이 나오는데 강단사학계에서는 신라의 행정체제를 지증왕대부터라 하여 부정적을 보지만 그 이전의 기록에 현, 군등의 행정명칭이 보이므로 이를 부정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ref> [[가야]]도 [[대가야]]시대에 어느정도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를 이룩하면서 직할 소국을 현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가령 [[우륵]]의 고향인 성열현(誠熱縣)은 이전의 [[신번현|사이기국]]이라는 소국이었다. 삼한통일후 신라는 [[9주 5소경]]이라는 상당히 치밀하고 정연한 행정체제 구축을 이루면서 전국의 현령(縣令)의 정원을 201명으로 했는데, 이때에는 등급이 없이 모두 현령을 두었던 듯하다.
 
=== 고려,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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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초에 전국의 12개 고을에 12목을 설치하기 전까지 전국은 지방호족에 의한 [[지방자치제]]가 이루어졌고 그 전까지는 과세를 위한 관리들의 출장식 파견외에는 어떤 행정권도 휘두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중앙정부가 지방으로 행정권을 행사하면서 전국의 현들은 현령(縣令)을 두었던 현과 중앙에서 전혀 지방관이 배치되지 않던 속현(屬縣)의 두 가지로 구분되었다. 속군, 속현등의 발생원인은 후삼국시기에 강력한호족이 지배하는 고을에 인근 고을들이 지배를 받으면서 생긴 지배관계를 중앙정부에서 행정체계에 반영한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 외에 너무 작은 규모의 고을의 수가 늘어 일일이 지방관이 파견될 수 없었던 탓도 있어서였다. 현령이 배치된 현은 독자적인 행정이 행해졌으나 속현은 지방관이 배치된 다른 지방 행정 관청에 완전히 예속되었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고려 전기에 주현 130개, 속현 374개를 기록하고 있다. [[고려 예종|예종]] 때부터는 속현에도 [[감무]](監務)라고 부르는 7품의 지방관이 점차적으로 배치되었고 이후 지속적으로 감무를 파견하는 현의 수를 늘려서 속현 현상을 해소하려 노력해갔다. 공민왕때에는 현령과 감무를 모두 안집별감(安集別監)이라는 명칭으로 일시 통일했다가 창왕대에 되돌렸었다. 조선시대 이후에 감무는 [[현감]](顯監)으로 바뀌었고 그외의 감무가 미처 파견되지 못할만큼 작은 속현은 서로 통폐합하거나 소속되었던 고을로 합병되었다. 조선시대에 전국의 현은 164개였는데 종 5품의 현령이 다스리는 큰 현은 26곳, 현감이 다스리는 작은 현은 138명이었다. 속현은 1530년 중종 25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2개의 속현이 기록되어 조선중기까지 속현이 조금이나마 남아있었다가 결국 17세기경에 모두 소멸되었다.
갑오개혁때의 행정체제 개혁으로 현들은 모두 군으로 승격되어 현 제도는 폐지되었다.
 
== 일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