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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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기년을 참고로 옮기고, 당대에 제작된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년을 기준으로 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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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廣開土王, [[374년]] ~ [[413년412년]]?, 재위 : [[392년391년]]? ~ [[413년412년]]?)<ref>《삼국사기》의광개토대왕릉비의 기년 기준이다. 광개토왕릉비의후대에 기록된 삼국사기의 기년에 따르면 391년에392년에 즉위하여 412년에413년에 사망하였다. </ref>은 [[고구려]]의 제19대 [[왕]]이다. 이름은 담덕(談德) 또는 안(安)으로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國崗上廣開土地好太聖王) 등의 시호가 전해지며, 남, 북한 사학계에서는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또는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광개토왕릉비]]에는 연호인 [[영락 (고구려)|영락]](永樂)을 왕호로 사용한 '''영락태왕'''(永樂太王)<ref>사단법인 고구려발해학회에서는 해당 부분을 '영락태왕'으로 해석하지 않고 있다. "二九登祚,  爲永樂. 太王 恩澤△于皇天" - "열 여덟 살에 왕위에 올라 연호를 영락(永樂)이라 했다. 태왕(太王)의 은택은 하늘에 두루 미쳤으며"[http://www.palhae.org/zb4/view.php?id=pds2&page=3&sn1=&divpage=1&sn=off&ss=on&sc=on&keyword=광개토&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63] </ref> 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 [[일본]] 등지에는 '''호태왕'''(好太王)으로 알려져 있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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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은 내치에도 힘썼다. 광개토왕 대는 [[평양]]을 크게 중시하여 393년<ref name="기년"/>에는 9개의 절을 평양에 창건하고 399년에는 왕이 직접 평양에 행차하기도 하였다. [[409년]]<ref name="기년"/>에는 나라 동쪽에 독산성(禿山城) 등 6개 성을 쌓고 평양의 민호를 옮겨 살게 하였으며 다시 남쪽으로 순행하였다. 또한 역대 왕릉의 정비에 힘써 수묘인(守墓人) 제도를 정비하고 실시할 것을 [[장수왕]]에게 유언하였다. 이러한 내치로 광개토왕릉비에는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 칭송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413년412년]](광개토왕릉비에삼국사기에 따르면 [[412년413년]])에 서거하니 장수왕은 [[414년]]에 [[광개토왕릉비|능비]]를 세우고 유언에 따라 수묘인을 두어 [[태왕릉|왕릉]]을 관리하게 하였다.
 
== 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