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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1798년]]에 [[나폴레옹]]이 [[영국]] 본국과 [[인도]]와의 연락을 단절하기 위해 행한 이집트 원정은 [[프랑스 혁명]]에 집중되어 있던 열강의 관심을 재차 동방으로 향하게 하고, 또한 투르크(터키) 영내의 여러 민족에 프랑스 혁명의 자유사상을 초래하여 그들의 민족적 자각을 촉구하게 되었다. [[1804년]]에는 [[세르비아]]에서 독립을 향한 반란이 일어나고, [[불가리아]]도 해방운동이 개시되었다. 이집트에서는 [[1805년]] [[무함마드 알리]]가 태수(太守)로 취임하자 근대화 개혁에 착수하여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자립을 뚜렷이 했다. [[1806년]]부터 투르크는 [[러시아]]와의 전쟁에 돌입하여 [[1812년]]의 [[부쿠레슈티 조약]]에 의해 [[베사라비아]] 지방을 상실하였다. 열강의 간섭은 [[그리스 독립전쟁]](1821~1829) 이래 노골화되었다. 이 전쟁에서 영국·프랑스·러시아는 [[그리스]]를 도와 투르크와 싸워 [[1829년]]의 [[아드리아노플 조약]]에 의해 그리스의 독립을 승인케 하였다. 이어 1831~1833년에 이집트의 무함마드와 오스만 제국 간에 분쟁이 발생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를 지지하고, 러시아는 고립된 투르크(터키)를 후원하였다. 이때에 러시아는 투르크와 [[다르다넬스 해협]] 통과의 독점적 권리를 인정받는 [[운키아르-스켈레시 조약]]을 맺어 영국·프랑스의 불만을 샀다. 그 후 [[1839년]] 투르크·이집트간의 싸움이 재개되자 프랑스는 재차 이집트를 지지하였으나, 영국은 다음해에 [[런던 4국 조약]]을 통해 이집트 국경을 확장케 하여 프랑스의 활동을 견제하고, 또 운키아르-스켈레시 조약을 파기하여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리하여 오스만 제국과 이집트의 문제는 전적으로 유럽 열강의 국제 대립 관계에 의해 좌우되기에 이르렀다. 유럽 열강의 간섭, 영내(領內) 여러 민족의 반란으로 고민하는 오스만 제국에 있어서 근대화 개혁은 이미 19세기 초부터 시작되어 [[예니체리]]제(制)를 폐지하고, 신식 군대를 편성하였다. [[1839년]] 이후에는 [[탄지마트]]라 불리는 사법·행정·산업·교육에 걸친 개혁이 착수되었다.
 
== 참고 자료 ==
* {{글로벌}}
 
[[분류:오스만 제국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