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6년 정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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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번역, 후일담은 혹시나 해서 일부러 빼고 번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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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11일 (금) 23:25 판

메이지 6년 정변(明治六年政変, 1873년)은, 메이지 초기의 정변이다. 당시 정부 수뇌였던 산기의 반 이상과 군인, 관료 약 600명이 사퇴했다. 정한론이 발단이 되어, 정한론 정변(征韓論政変)이라고도 한다.

경위

발단은 사이고 다카모리의 조선 사절 파견 문제였다. 왕정복고 후 개국을 한 일본은 조선에게 일본의 취지를 전할 사절단을 몇 번 파견했다. 또한 당시의 조선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장악, 유교의 부흥과 쇄국 정책을 채택, 이를 이유로 일본과의 관계를 단절해야한다는 의견이 나오게 된다. 더욱이 당시 일본 대사관을 이용하여 정한을 정부에 결행하도록 했다고 하는 설도 있다. [1]

사이고의 사절 파견에 찬성한 자가 이타가키 다이스케, 고토 쇼지로, 에토 신페이, 소에지마 다네오미, 기리노 도시아키, 오쿠마 시게노부, 오키 다카토이며, 반대측이 오쿠보 도시미치, 이와쿠라 도모미,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구로다 기요타카였다. 당시 이와쿠라 사절단이 파견중이라 파견 중, 정부가 중대한 개혁을 하지 않는다는 맹약을 위반하게 되고, 일본 국내가 급격한 개화로 인해 혼란해 하고 있던 것은 오쿠보 등의 태도를 강경하게 했다. 오쿠보등 이와쿠라 사절단의 귀국 이전인 8월 17일, 한번은 각의로 사이고를 조선으로 전권대사로 파견하기로 결정되었지만, 다음 날 이 안을 제출 받은 메이지 천황은 ‘사절단이 귀국할 때 까지 국가에 관한 중요 안건은 결정하지 않는다.’라는 결정을 바탕으로 이와쿠라 도모미가 귀국할 때 까지 기다리고, 이와쿠라와 충분히 논의한 끝에 다시 제출되었지만 사이고 파견안을 각하한다. (이와쿠라의 귀국은 9월 13일)

오쿠보는 대원군이 설득에 귀를 기울일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고, 사이고가 조선에 간 경우 반드시 살해당한다,(살해당하지 않아도 대원군이 사절을 거부할 경우 전쟁의 대의명분이 생기게 된다)그럴 경우 결과적으로 조선과 전쟁을 벌이게 되지 않을까하는 위기감, 당시 일본에는 조선과 청, 러시아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결국 전쟁을 하게 되는) 국력이 갖추어 지지 않았다는 전략적 판단, 사절단과의 약속을 무시하고, 위험한 외교적 도박에 손을 대려하는 사이고측에 대한 감정적 반발, 조선의 문제보다도 먼저 손대야하는 외교안건이 존재하는 일본의 국제적 입장[2]등을 이유로 강하게 반대, 비용문제 등도 포함해서 정한의 불리를 설득하여 연기를 주장했다.

10월 14일부터 15일까지 열린 각의에서는,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 이하 산기 사이고 다카모리, 이타가키 다이스케, 에토 신페이, 고토 쇼지로, 소에지마 다네오미, 오쿠보 도시미치, 오쿠마 시게노부, 오키 다카토가 출석. 이 때, 오쿠마, 오키가 반대파로 돌아서 결국 동수(同數)가 된다. 하지만 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사임한다고 하는 (사이고가 사임할 경우, 사쓰마 출신의 관료, 군인 다수가 중앙정부에서 빠져나올 우려가 있다) 사이고의 말에 공포를 느낀 의장 산조가 즉시 파견을 결정. 이에 대해 오쿠보, 기도, 오쿠마, 오키는 사표를 제출, 이와쿠라도 사의를 전했다.

후에 메이지 천황에게 제출, 칙재를 받으면 되지만 이 사태에 어느 쪽이라고 하자면 반대파였던 산조가 10월 17일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쓰러져 의식 불명에 빠진다. 태정관직제에 따라 이와쿠라가 태정대신 대리로 취임하자, 메이지 천황의 의사를 구속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10월 23일, 이와쿠라는 각의결정의 의견서와는 별도로 ‘사적 의견’으로 사이고 파견 연기 의견서를 제출. 결국 이 의견서가 받아들여져 사이고 파견은 무기한 연기가 되었다.

그리고 사이고는 당일, 이타가키, 고토, 에토, 소에지마는 다음날 10월 24일 사의를 제출. 10월 25일에 수리되어 찬성파의 산기 5명은 하야했다. 또한 하야한 산기가 고노에(近衛) 총감의 인계를 하지 않은 채 귀향, 법령위반으로 사이고를 책망하지 않고, 역으로 사이고를 정부로 복귀시키도록 손을 쓴 사실에 분개하여, 이타가키, 고토와 가까운 관료, 군인이 대량으로 사직하였다.

이 후, 에토 신페이로 인해 실각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이노우에 가오루는 사이고, 에토 등의 사임 후 한참 지난 뒤 공직에 복귀하게 된다. 이 정변이 사족 반란이나 자유민권운동의 발단이 되기도 했다.

주석

  1. 이는 사이고가 이타가키에게 보낸 서한에서 엿볼 수 있다. 이를 근거로 사이고는 교섭보다는 무력행사를 전제로 했으며, 일본 교과서등에서는 이 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 청과의 류큐귀속 문제, 러시아와의 사할린 섬, 쿠릴 열도 영유권 문제, 영국과의 오가사와라 제도 영유권문제, 불평등 조약의 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