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무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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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무운동의 역사적 성격==
양무운동을 추진한 세력들은 서구의 군사적 위협을 인식하고 기존의 중화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중체서용'을 내세웠다. 그러나 양무운동의 추진 주체는 [[봉건제|봉건]]관료 또는 매판관료세력이지만 그들은 [[청조]]의 전통적 관료와는 달리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성장한 지방관료 세력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무너져가는 [[청조]]의 통치조직을 재건하여 봉건왕조의 체제를 유지하려는데 주된 개혁목표를 두었고 이것은 양무운동의 최대 한계점으로 작용된다.
 
그런데, 양무파 관리들은 정부 내에서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였고 정부 내에서도 극히 일부의 진보적 관료를 제외하면 여전히 보수적,수구적 관료가 중심이 되었다. 특히 [[서태후]]의 섭정은 양무운동의 성패보다는 이 운동이 자신의 권력유지에 어떤 작용을 하느냐에 딸사ㅓ 정책추진이 변화무쌍하게 달라졌다. 이는 결국 양무운동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와 함게 양무운동을 추진한 세력이 지방에 뿌리를 두고 지역적 차원에서 이 운동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지방관이 바뀔 때마다 중단되기도 하고 지방관이 임지를 옮길 때 시설을 새로운 임지로 이전하는 사례도 드물지 않았다. 특히 양무기업 자체가 중요한 자금원이기 때문에 기업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분쟁이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양무운동은 이렇게 정책적인 면에서 비효율적이며 중앙정부에 의해 체계적으로 추진되지도 못하였다. 결국 이러한 한계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크게 패함으로써 양무운동의 한계성과 관료들의 부패함이 드러나버리게 된다.
 
==외부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