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훈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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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徐州, 현 [[장쑤 성]] [[쉬저우 시]])를 본거지로 삼아 서주・사주(泗州, 현 [[장쑤 성]] [[화이안 시]])・숙주(宿州, 현 [[안후이 성]] [[쑤저우 시 (안후이 성)|쑤저우 시]])・호주(濠州, 현 [[안후이 성]] [[추저우 시]])의 4[[주 (행정 구역)|주]]를 지배했던 무녕군(武寧軍) 번진도 평판이 좋지 않은 번진으로 유명했다. 이것은 서주 일대가 수륙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 일대의 장병들이 특별한 우대를 받고 있었던 데 따른 것이었다. [[당 목종]] 연간에 무녕군 절도부사(武寧軍節度副使)에 임명된 [[왕지흥]]이 서주에 부임하면서 2천 명의 날래고 사나운 정예병들을 모집하여 7개 군단으로 나누어 정예부대를 창설했다. 그들에게는 여러가지 특권이 주어져 있어서, 왕지흥이 다른 번진으로 전임된 이후에도 그 특권은 계속되어 후임 절도사들도 줄곧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하였다.
 
[[862년]] [[음력 7월|7월]], 서주의 교병(驕兵, 무녕군 번진의 정예병들은 서로 각자의 지위와 특권을 세습하였기 때문에 '교병(驕兵)'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들이 신임 무녕군 절도사인 온장(溫璋)을 축출해 버린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온장이 엄격한 관리라는 평판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상사(上司)를 내놓으라는 교병들의 [[메시지]]였지만, 이것이 그들의 파멸로 이어져 버리고 말았다. 온장의 후임으로 부임해 온 무녕군 절도사가 [[구보의 난]]을 단 일격에 진압한 명신 [[왕식 (당나라)|왕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왕식은 구보의 난을 막 진압한 직후였기 때문에, 구원군으로 출진해 있었던 충무군(忠武軍, 본거지는 현 [[허난 성]] [[쉬창 시]])과 의성군(義成軍, 본거지는 현 [[허난 성]] [[안양 시]])의 두 번진 병력을 임시로 지휘하고 있었다. 구보의 난이 진압되면서 이들 두 번진 장병들을 위로하여 해산시키는 단계에 이른 다음에 잠시 동안 그들에게 서주의 교병들을 몰살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었다. 그 결과 수천 명의 교병들이 일거에 떼죽음을 당하였고, 이처럼 예상치도 못한 왕식의 무력 조치로 무녕군 번진은 괴멸되어 해체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마침내 무녕군 번진은 소멸해 버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무녕군 번진 소속의 교병들 전원을 몰살시키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살아남은 교병들은 비적(匪賊)이 되었다. 정부는 1개월 이내에 자수하면 죄를 묻지 않겠다는 포고를 발령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