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훈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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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군은 지금의 [[산둥성]] 남부, [[장쑤성]], [[안후이성]] 북부 등을 지배하고, [[볜허강]]에 와서 당나라 황실을 위협했다. 당나라는 [[강승훈]]을 보내 [[번진병]], [[사타족|사타]], [[토욕혼]] 등 여러 민족 군대를 이끌고 방훈을 공격했다. 방훈의 반란군은 장군 [[장현임]]의 배신으로 숙주와 서주에서 잇달아 패배했고 [[869년]] 9월 방훈도 [[기현 전투]]에서 살해되면서 반란은 1년 만에 평정되었다.
 
== 반란이반란의 일어난 경위배경 ==
=== 교만한 병사들 ===
[[안록산의 난]] 이후, [[당나라]] 말기에 접어들면서 병사들의 반란이 종종 발생하게 되었다. 이것은 지방의 번진(藩鎭)에 파견된 절도사(節度使)가 넉넉한 예산을 벌기 위해 필요 경비의 삭감을 실시한 결과, 군인들의 급여가 대폭 감소하면서 이에 불만을 품은 장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절도사를 축출하고 자신들과 적성이 맞는 절도사를 추대한 데 따른 것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장병들을 지나칠 정도로까지 우대하여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절도사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