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불교 사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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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불교}}
본 문서 '''한국의 불교 사상'''은, 한국에 전래된 불교에서 전개된 사상을 말한다설명한다.
 
한국 불교의 특징으로는 [[호국 불교]]적 성격{{.cw}}[[통불교]]적 성격{{.cw}}[[자심]](自心)을 밝히는 것을 중시한다는 점의 세 가지를 들 수 있다.<ref name="글로벌-한국의 불교〔서설〕">[[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한국의 종교/한국의 불교/한국의 불교〔서설〕|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의 불교〔서설〕]],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ref> 이러한 특징적 성격들은 [[4세기]]경 [[삼국 시대]]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오랜 시간을 흐르면서 불교가 한국에 토착화되면서 전개된 한국의 여러 불교 사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4세기경 [[삼국 시대]]에 불교가 최초로 중국을 통해 전래되었을 때, [[고구려]]{{.cw}}[[백제]]{{.cw}}[[신라]]의 삼국에서 불교는 모두 선인선과(善因善果)의 [[인과]]를 가르치는 새로운 종교로서뿐만 아니라 새로운 [[주술]](呪術)로도 여겨져 토속 신앙인 [[무속 신앙]]과 융합되어 무속 신앙적인 성격을 가졌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또한 고대 국가 건설의 정신적인 기둥의 역할을 하는 [[호국 불교]]적 사상의 성격을 띄었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신라의 [[불국토 사상]]은 [[호국 불교 사상]]과 결부되어 [[삼국 통일]]의 밑거름이 되었다.<ref name="글로벌-불국토사상"/>
 
이후 [[남북국 시대]]의 [[신라]]에서는 불교 본연의 자세와 사상에 기반한 불교 연구가 깊어졌으며 중국 및 다른 나라의 불교 사상과는 구분되는 특징을 지닌 [[일심 사상]]{{.cw}}[[화쟁 사상]]{{.cw}}[[화엄 사상]]{{.cw}}[[유식 사상]]{{.cw}}[[정토 사상]]{{.cw}}[[밀교 (불교)|밀교 사상]] 등이 성립되었다. 이 시대에 성립된 [[통불교]](通佛敎)적 성격은 한국 불교 사상의 특징적인 성격 중 하나가 되었다.<ref name="글로벌-한국의 불교〔서설〕">[[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한국의 종교/한국의 불교/한국의 불교〔서설〕|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의 불교〔서설〕]],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ref> 이러한 성격을 지닌 한국의 불교 사상으로는 [[일심 사상]]{{.cw}}[[화쟁 사상]]{{.cw}}[[교관겸수]]{{.cw}}[[정혜쌍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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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4세기]]경에 [[고구려]]{{.cw}}[[백제]]{{.cw}}[[신라]]가 처음에 받아들인 [[불교]]는 모두 선인선과(善因善果)의 [[인과]]를 가르치는 새로운 종교로서뿐만 아니라 갖가지 재앙과 불운을 없애고 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새로운 [[주술]](呪術)로도 여겨졌는데 이런 주술적인 면은 재래의 [[샤머니즘]]적인 토속 신앙인 [[무속 신앙]]과 상통하였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한국의 종교/한국의 불교/한국불교의 사상#한국불교의 사상〔개설〕|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사상 > 한국불교의 사상〔개설〕]],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ref> 이런 현상은 오늘날의 [[한국 불교]]에도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한국 불교]]가 토착화하는 과정에 있어 토속 신앙인 [[무속 신앙]]과의 융합은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였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또한 [[3국]]의 지배층들은 모두가 새로운 지배 체제를 갖추어 왕권을 보다 강화함으로써 고대 국가를 이룩함에 있어 [[불교]]를 그 정신적인 기둥으로 삼았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이 때문에 [[한국 불교]]는 초기 수용 과정에서부터 종교적 차원과 국가적 차원의 한계가 분명치 않았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고구려]]에서는 [[5세기]] 후반부터 불교 연구가 활발하여져서 [[승랑]](僧朗){{.cw}}[[실법사]](實法師){{.cw}}[[인법사]](印法師) 등이 [[삼론학계]](三論學界)에서 명성을 떨쳐 부정(否定)의 논리를 전개하는 [[중도 사상]](中道思想)을 밝혔으며, 또 중국으로부터 돌아오면서 [[의연]](義淵)은 남도파 [[지론종]](南道派 地論宗)의 사상을 소개했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그러나 [[고구려]]의 일반 국민들은 대개 불교 사상에 혼동을 일으키고 있었으니 [[미타 정토]](彌陀淨土)와 [[미륵 정토]](彌勒淨土)와의 혼동이 그것이었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백제]]는 [[성왕]](聖王) 때 [[겸익]](謙益)이 [[인도]]로부터 돌아온 것을 계기로 [[계율]]사상이 성하게 되었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중국 [[천태종]](天台宗)의 제2조였던 [[혜사]](慧思) 밑에서 법화삼매(法華三昧)와 관심법(觀心法)을 얻고 돌아온 [[현광]](玄光)과 유학(留學)은 하지 않았어도 《[[속고승전]](續高僧傳)》의 고승들 중의 한 명으로 나오는 [[혜현]](惠現) 등이 [[법화사상]](法華思想)과 [[삼론사상]](三論思想)을 널리 편 일도 있었으나 [[백제의 불교]]는 극단적인 계율주의로 흘러 갔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신라]]는 3국 가운데서도 특히 [[불교]]를 국가통일의 정신적 원리와 국민사상으로 삼아 국가 정책에 적극 반영시켜 국가적{{.cw}}현실적인 이익을 종교적 사명보다 앞세웠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집단 훈련을 통해서 국가가 요청하는 이상국가의 역군을 기르기 위한 [[화랑제도]]가 [[진흥왕]] 때 창설된 것도 그 중 하나였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화랑]]은 서민들을 교화하는 [[미륵]]의 화신으로 받들어졌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신라의 왕족은 스스로의 [[골품]]을 불교 사상으로 정화하여 신성가족(神聖家族)이라는 골품상의 관념을 세웠다. [[진사상]](眞思想)이라는 것은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말이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이러한 국가 불교와 왕실 불교 육성의 뚜렷한 지도자는 [[원광]](圓光)과 [[자장]](慈藏)이었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수나라]]에서 신라인으로는 처음으로 [[섭론종]](攝論宗)의 참신한 사상을 배우고 돌아온 [[원광]]은 《[[세속오계]](世俗五戒)》와 《[[걸사표]](乞師表)》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을 통해 [[불교]]에 입각한 도덕관을 세웠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한편 [[자장]]에 의해 발전 및 대성하게 된 [[불국토 사상]]인 신라불국토설(新羅佛國土說)은 [[호국 불교|호국 사상]]과 결부되어 불교의 유통에 공헌한 점이 많았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이러한 때에 불교 본연의 자세를 세우려고 나섰던 [[혜숙]](惠宿){{.cw}}[[혜공]](惠空){{.cw}}[[대안]](大安){{.cw}}[[원효]](元曉) 등의 교화는 서민들이 자기의 의사와 결단으로 자기의 종교를 가지게 하였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특히 [[원효]]가 [[정토]]의 주된 뜻은 본래는 범부를 위한 것이지만 [[삼승]](三乘)의 성인을 위한 것도 아우르고 있다는 "본위범부 겸위성인설(本爲凡夫兼爲聖人說)"을 외치며 널리 [[미타사상]](彌陀思想)을 펼친 일은 [[신라]]에서 [[불교]]가 대중화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신라의 경우 [[남북국 시대]] 전반기에 수많은 승려들이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불교 사상을 연구했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그러나 이들 신라의 승려들은 중국의 경우와는 달리 어느 일가 또는 일파에 치우치지 않고 총화불교(總和佛敎)로서 [[통불교]](通佛敎)적인 학풍을 세웠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이러한 통불교적 학풍의 대표적인 인물이 [[원효]]였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원효]]는 [[유가 사상]](瑜伽思想)과 [[중관 사상]](中觀思想) 등 모든 불교 사상을 하나의 이치("[[일심 사상]]{{.cw}}一心思想")로 귀납하여 자기분열 없이, 보다 높은 차원에서 불교 사상 체계를 세웠는데, [[원효]]의 이러한 [[통불교]]적 조화 정신을 가리켜 [[화쟁 사상]](和諍思想)이라 한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원효]]의 저작 중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와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은 [[일심 사상]]을 잘 보여주는 핵심적인 저술이며, 《[[십문화쟁론]](十文和諍論)》은 [[화쟁 사상]]을 잘 보여주는 핵심적인 저술이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이장의]](二障義)》 역시 [[원효]]의 불교사상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인데, 여기서 그는 신역(新譯)불교와 구역(舊譯)불교의 [[단혹설]](斷惑說)을 서로 하나의 체계로 모순 없이 통합했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범부(凡夫)와 부처 간의 차이도 이를 선천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오직 시간적인 선후관계로 다루었던 것도 [[화엄 사상]](華嚴思想)의 입장에서 오성각별설(五性各別說)을 지양시킨 것이었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원효의 저서로는 이 밖에 《[[대승기신론별기]](大乘起信論別記)》{{.c}}《[[범망경보살계본사기]](梵網經菩薩戒本私記)》 등이 전하여 온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또 [[의상]](義湘: 625-702)은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c}}《[[백화도장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을 지어 특히 [[화엄 사상]](華嚴思想)을 정통적으로 널리 폈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화엄 사상]]은 귀족사회에 크게 환영되었던 것이므로 [[원효]]나 [[의상]] 외에도 많은 승려들이 이를 연구하였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정토 사상]](淨土思想)에 있어서는 [[태현]](太賢){{.cw}}[[의적]](義寂){{.cw}}[[법위]](法位) 등이 나와서 정토 신앙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였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그러나 이들은 다 같이 [[원효]]의 학풍을 이어받아 《[[무량수경]](無量壽經)》과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각각 설파된 [[10념]](十念)을 서로 한 체계로 통합했을 뿐만 아니라 미륵계(彌勒系) 경전에 논술된 [[10념]]까지도 함께 묶었는데, 이러한 교의는 신라 [[정토 사상]]의 독특한 전통이 되었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일찍이 [[당나라]]에 들어간 [[원측]](圓測: 613∼696)은 그곳에 오래 머물러 [[현장]]의 문하에서 [[유식학자]](唯識學者)로서 일가를 세우고 [[서명학파]](西明學派)를 이루었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서명학파]]는 정통파인 중국의 [[규기]](窺基)와 그 후계자들로부터 이단시되었으나 [[원측]]의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는 오히려 그 양심적인 학풍이 인정되어 [[티베트어]]로 완역되기까지 하여 오늘날 유식사상사(唯識思想史)에 있어서 건실한 신라계 [[유식 사상]]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신라 국내에서도 많은 [[유식학자]]들이 배출되어 [[태현]]의 《[[성유식론학기]](成唯識論學記)》는 일본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일본 [[나라 시대]](奈良時代)의 [[범망보살계 사상]](梵網菩薩戒思想)도 신라승들의 연구에 의한 것이었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이런 불교 사상의 연구와는 별개로 남북국 시대에는 [[밀교 (불교)|밀교]](密敎)가 새로 들어와 [[명랑]](明朗){{.cw}}[[해일]](海日) 등의 활약으로 [[밀교 (불교)|밀교]]가 성행하게 되었고 [[밀교 (불교)|밀교]]의 [[다라니]](陀羅尼)가 널리 민간에 보급되었다.<ref name="글로벌-한국불교의 사상〔개설〕"/>
 
==이제합명중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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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 {{글로벌|분류=불교|제목=[[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한국의 종교/한국의 불교/한국불교의 사상#한국불교의 사상〔개설〕|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사상 > 한국불교의 사상〔개설〕]]}}
* {{글로벌|분류=불교}}
* 장휘옥, [http://www.kr.buddhism.org/read.cgi?board=wonhyo&y_number=40&nnew=1 "원효는 왜 定性二乘의 왕생을 부정했는가"]. 2011년 3월 7일에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