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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년]] [[위 (삼국)|위]](魏)의 2대 황제 [[조예]](曹叡)가 죽고 [[조방]](曹芳)이 즉위하자, 대장군(大將軍) [[조진]](曹眞)의 아들 [[조상 (조위)|조상]](曹爽)이 정권을 잡았다. 그의 빈객은 500명에 달했고, 그 중 [[하안]](何晏) · [[등양]](鄧颺) · [[이승]](李勝) · [[정밀]](丁謐) · [[필궤]](畢軌) · 대사농(大司農) [[환범]](桓範)이 조상의 측근이 되어 조정을 좌지우지했다.
 
조상은 하안의 건의로 [[사마의]](司馬懿)를 태부(太傅)로 삼고 병권을 장악하여 동생 [[조희 (조위)|조희]](曹羲)를 중령군(中令軍), [[조훈]](曹訓)을 무위장군(武威將軍), [[조언]](曹彦)을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삼고 각각 어림군 3000명을 거느려 맘대로 궁에 드나들게 했으며, 하얀하안 · 등양 · 정밀에게는 상서(尙書) 벼슬을 내리고 필궤는 사례교위(司隷校尉), 이승은 하남윤(河南尹)으로 삼아 조상의 세력은 날로 커져갔다.
 
이에 사마의는 두문불출하며 마치 정신이 나간 것처럼 행동했고, 그러자 조상은 종종 사냥을 즐겨 동생 조희와 환범이 간언을 했으나 조상은 이를 듣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