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계수록: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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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 및 평가 ==
17세기 중ㆍ후반의 조선은 왜란과 호란으로 이어진 전란의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구조 개편이 요구되었던 시대였다. 그 과정에서 대두된 것이 실학이었고 실학에서 가장 크게 강조된 개념이 바로 '개혁'이었는데, 유형원의 《반계수록》은 개혁의그 '개혁'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한편, 당시 시대가 요구하는 대안을 비로소체계적으로 세분화하여 정리했으며 그것은 후대의 남인 실학자들의 개혁사상의 원류이자 '개혁 교과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저자 유형원이 재야의 학자였던 탓에 처음에는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는데, 숙종 4년([[1678년]]) 유형원과 평소 교분이 깊었던 배상유가 상소하여 《반계수록》이 제시한 정책을 시행할 것을 청했고, 영조 17년([[1741년]])에도 유형원의 제자였던 승지 양득중이양득중(梁得中)이 경연에서 《반계수록》을 강론하자고 청하는 등 《반계수록》의 중요성은 꾸준히 제기되어제기되었다. 일찌기 소론 계열의 학자로서 유형원과 동시대를 살았던 [[윤증|윤증(尹拯)]]은 《반계수록》을 읽고 크게 감탄하였는데, 그가 타계한지 38년이 지난 1711년에 책의 내용에 감명을 받아 직접 발문을 쓰기도 했다. 윤증은 그의 저서를 구해다 집에 두고 읽어보면서 "세상을 경륜할 업무에 뜻을 둔 자가 채택하여 실행할 수만 있다면 저술한 공로가 그때서야 제대로 나타날 것이니 어찌 사라져버릴 이치가 있겠는가"라며 극찬하였다. 마침내 영조 36년([[1760년]]) 영조는 《반계수록》3부를 국가에서 인쇄, 간행하라는 명을 내린다. 정조 또한 《반계수록》에 주목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수원 화성 등의 축조로 유형원 자신이 《반계수록》에서 수원에 성을 쌓아야 함을 주장한 바 있으며, 정조는 "백 년 전에 마치 오늘의 역사를 본 것처럼 논설했다"며 유형원을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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