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프랑수아 카르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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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곳=[[프랑스]] [[파리]]
|설명=
|복무=[[그림:Pavillon royal de France.svg|22px]][[부르봉
|복무 기간=
|최종 계급=[[사단장]]
|부대=
|지휘=
|주요 참전 전투/전쟁=[[
*[[툴롱 포위전]]
|서훈 내역=
|기타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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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밥티스트 프랑수아 카르토'''(Jean Baptiste François Carteaux, 1751년 1월 31일 - 1813년 4월 12일)는 [[프랑스]] [[
==생애==
카르토는 1751년 태어나 화가가 되었다. 화가로써 마상(Horseback)의 국왕 [[루이 16세]]의 초상을 포함한 몇 개의 평범한 작품을 그렸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카르토는 군사에 관련된 훈련을 일체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장군이 되어, 알프스 방면군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카르토는 부임한 후 [[프로방스]]의 왕당파 반란군의 진압을 명령받아 1793년 7월 16일 소수 부대를 격파하는데 성공했다.
1793년 8월초쯤 카르토는 중요한 항구인 툴롱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고 [[
카르토의 정체와 포병의 부적절한 운용이 판명되자, [[공안위원회 (프랑스 혁명)|공안위원회]]의 파견의원인 [[오귀스탱 로베스피에르]](Augustin Robespierre)와 [[앙투안 크리스토프 살리체티]](Antoine Christophe Saliceti)는 젊은 포병대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카르토의 새로운 포병지휘관으로 지명했다. 전권을 갖고 있던 로베스피에르와 살리체티의 지지와 배경으로 정력적으로 움직인 나폴레옹은 곧 레에트(l'Eguillette)와 바라기에(Balaguier)의 요새를 빼앗을 계획을 입안했다. 나폴레옹은 이 요새의 탈취로 인해 영국-나폴리 함대에 대한 정밀한 집중포격이 가능하게 되어, 그로 인해 툴롱에서 적을 몰아 낼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정확히 예측했다. 그러나 카르토는 이를 의심하고, [[앙리 델라보르데|델라보르데 소장]](Major General Delaborde) 지휘하 부대에게 미적지근한 공격을 명령했다. 이 공격은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이 요새가 가진 위치의 중요성을 영국-나폴리 군대에게 느끼게 해준 결과가 되어 영국측은 곧 방비를 강화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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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참담한 실패 후 카르토는 나폴레옹에게 새롭게 보강된 영국-나폴리의 요새를 포격하기 위해 복수의 포대를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나폴레옹은 군의 지휘권은 나에게 있다는 카르토의 항의에 상관하지 않고, 작전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확보했다. 10월 하순 나폴레옹은 [[국민 공회]]에 편지를 보냈는데, 그 속에는 상관들의 자질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고, 그들을 ''바보들의 무리''라고 불렀다. 그 결과 카르토는 1793년 11월 11일 해임되고, 얼마 동안 투옥되었다. 지휘권은 [[자크 프랑수아 뒤고미에]] 장군에게 인계되었다.
투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카르토는 [[공포정치]]에서 살아 남았고, 거기에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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