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라노 시게모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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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시가 니조 천황파에서 이탈하여 고시라카와 상황을 지지하여, 닌안 원년([[1166년]]) 10월에 헤이시의 피가 섞인 노리히토 친왕이 태자로 책봉된다. 시게모리의 부인 쓰네코와 후지와라노 구니쓰나(藤原邦綱)의 딸 쓰나코가 태자의 유모로 뽑히면서 시게모리는 메노토(乳父)<ref>귀인 자제의 보육을 담당하는 남자</ref>가 되었고, 12월에는 기요모리의 후임으로 도구다이후(東宮大夫)가 된다. [[닌난|닌난(仁安)]] 2년(1167년) 2월에는 곤노다이나곤(権大納言)으로서 칼을 소지하고 궁중에 출입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한편 시게모리의 아버지인 기요모리는 5월 17일에 다죠다이진(太政大臣)에 취임했는데, 이보다 앞선 5월 10일에 시게모리는 [[도산도|도산도(東山道)]]ㆍ[[도카이도|도카이도(東海道)]]ㆍ[[산요도|산요도(山陽道)]]ㆍ[[난카이도|난카이도(南海道)]] 등지의 산과 바다에 출몰하는 도적들을 토벌하라는 선지를 받았다. 이에 따라 국가적인 군사ㆍ경찰권을 정식으로 위임받은 시게모리는 명실상부한 기요모리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게 된다. 나아가 [[단고 국|단고(丹後)]]ㆍ[[에치젠 국|에치젠(越前)]]을 영지로 받아 경제적으로도 일문 가운데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게모리는 건강이 좋지 않았던 듯, 12월의 동궁의 후미하지메(讀書始)<ref>귀인의 자제가 처음 학습을 시작할 때 치르는 의식</ref>에 불참하고, 다이죠에(大乗會)<ref>호쇼지(法勝寺)에서 매년 10월 치러지는 큰 법회</ref>의 상경(上卿)으로 내정되어 있던 것도 다른 이로 교체하는 등 건강상 문제로 인한 잦은 공식석상 불참이 기록에 보인다. 닌난 3년([[1168년]]) 2월에 아버지 기요모리도 병 때문에 출가하자 정세가 불안해질 것을 걱정한 고시라카와 법황은 태자 노리히토를 즉위시켜([[다카쿠라 천황]](|다카쿠라高倉天皇) 천황]]) 체제의 안정을 꾀했다. 그 뒤 시게모리는 12월에 곤노다이나곤을 사임하였다. 앞서 출가한 기요모리는 후쿠하라(福原)에 은거하고 있었으므로, 로쿠하라에는 시게모리가 남아 일문을 통솔하게 되었다.
 
===가오의 강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