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라노 시게모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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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겐의 강소와 시시가타니 사건===
그러나 4월이 되자 엔랴쿠지가엔랴쿠지에서는 가가노카미 후지와라후지와라노 모로타카의 유배를 요구하며 시위를강소를 일으킨다. 발단은 엔랴쿠지 관할관할하에 하의있던 절과 모로타카의 현지 대리인의대리인 사이의 분쟁으로, 이것이 중앙까지 파급되어 법황 정권과 엔랴쿠지의 정면충돌로 비화하였다비화된다. 이 때, 관병을 이끈 시게모리는 간인다이리(閑院裏)를 경호하며 승도들과 대치하나대치했지만, 가신이 쏜 화살이 신위를 모신 가마에 맞는 불상사를 일으켰다. 다카쿠라 천황은 호쥬지덴으로 피난하고 고시라카와 법황은 승도들을 실력으로 배제하려고해산시키려 했다. 그러나 교토가 전장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있다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크고컸고, 실제로 출동한 헤이시 일문도 엔랴쿠지와의 충돌에는충돌에 극히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취했기에 법황도 단념하고, 승도의 요구를 받아들여 모로타카를 유배하고 신위를 모신 가마를 쏜 시게모리의 가신을 투옥하였다.
 
그 뒤, 「타로쇼보(太郎亡)」라고 불리는 대 화재가 발생하여대화재로 다이교쿠덴(太極殿)과 [[간파쿠]]|간파쿠(白)]] 이하 구교 13인의 공경의 저택이 소실되었다. 그 중에는 시게모리의 저택도 포함되어 있었다. 5월, 고시라카와 법황은 엔랴쿠지에 보복을 결의하여, 엔랴쿠지의 주지 [[메이운]](明雲)을 해임하고 영지를 몰수하여 [[이즈노쿠니이즈 국|이즈]](伊豆)]]로의 유배를 명하였다. 시게모리 등은 "기요모리의 지시가지시 없으면없이는 움직이지움직일 않겠다」라고 회답했기없다"고 때문에회답했고, 이야기가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법황은 기요모리를 후쿠하라에서 불러내었다불러냈다. 기요모리도 출병에는 소극적이었으나소극적이었지만 법황은법황의 강경한 자세를 견지하여,자세에 어쩔 수 없이 출병을 승낙하였다.
그러나 4월이 되자 엔랴쿠지가 가가노카미 후지와라 모로타카의 유배를 요구하며 시위를 일으킨다. 발단은 엔랴쿠지 관할 하의 절과 모로타카의 현지 대리인의 분쟁으로, 중앙까지 파급되어 법황 정권과 엔랴쿠지의 정면충돌로 비화하였다. 이 때, 관병을 이끈 시게모리는 간인다이리(閑院内裏)를 경호하며 승도들과 대치하나, 가신이 쏜 화살이 신위를 모신 가마에 맞는 불상사를 일으켰다. 다카쿠라 천황은 호쥬지덴으로 피난하고 고시라카와 법황은 승도들을 실력으로 배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교토가 전장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반대하는 목소리가 크고, 실제로 출동한 헤이시 일문도 엔랴쿠지와의 충돌에는 극히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법황도 단념하고, 승도의 요구를 받아들여 모로타카를 유배하고 신위를 모신 가마를 쏜 시게모리의 가신을 투옥하였다.
 
6월 1일, [[다다 유키쓰나]](多田行綱)가 헤이시 타도의 음모를 밀고한 것으로밀고하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이 사건에는 시게모리의 처남처형 나리치카도 관여하고 있어, 시게모리는 붙잡혀 온 나리치카에게 "목숨만은 구하게 해보겠습니다」라고구해드리겠습니다"라며 격려하였다고 한다. 기요모리는 격노하여, 나리치카는 빗추에 유배당하고유배하고 관계자도 일망타진되었다(시시가타니의 음모(鹿ケ谷の陰謀)). 시게모리는 사코노에다이쇼를 사임하는 것으로 항의의기요모리에 대한 항의 자세를 보이고보이면서, 유배된 나리치카에서나리치카에게 몰래 옷을 보내는 등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노력했지만, 7월에 나리치카는 살해당했다살해당한다.
그 뒤, 「타로쇼보(太郎焼亡)」라고 불리는 대 화재가 발생하여 다이교쿠덴(太極殿)과 [[간파쿠]](関白) 이하 13인의 공경의 저택이 소실되었다. 그 중에는 시게모리의 저택도 포함되어 있었다. 5월, 고시라카와 법황은 엔랴쿠지에 보복을 결의하여, 엔랴쿠지의 주지 [[메이운]](明雲)을 해임하고 영지를 몰수하여 [[이즈노쿠니|이즈]](伊豆)로의 유배를 명하였다. 시게모리 등은「기요모리의 지시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겠다」라고 회답했기 때문에, 이야기가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법황은 기요모리를 후쿠하라에서 불러내었다. 기요모리도 출병에는 소극적이었으나 법황은 강경한 자세를 견지하여, 어쩔 수 없이 출병을 승낙하였다.
 
시게모리는 나리치카의 딸을 적자 [[다이라 고레모리|고레모리]](維盛)의 처를처로 맞는맞이하는시게모리와나리치카와는 친밀한 관계였다.관계를 유지했는데, 시게모리는 나리치카를그를 고시라카와 법황에 대한 교섭 창구 내지 중개역으로 중시하여, 법황에게 헤이시의 요구 사항을 전해주는 역할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 나리치카가 헤이시 타도의 주모자였기주모자였다는 때문에것은 시게모리는시게모리에게는 완전히정치적으로 체면을 구기고타격이었으며, 정치적인일문 내에서 지위도 실추되었다.
6월 1일, [[다다 유키쓰나]](多田行綱)가 헤이시 타도의 음모를 밀고한 것으로 상황은 급변한다. 이 사건에는 시게모리의 처남 나리치카도 관여하고 있어, 시게모리는 붙잡혀 온 나리치카에게「목숨만은 구하게 해보겠습니다」라고 격려하였다고 한다. 기요모리는 격노하여, 나리치카는 빗추에 유배당하고 관계자도 일망타진되었다(시시가타니의 음모(鹿ケ谷の陰謀)). 시게모리는 사코노에다이쇼를 사임하는 것으로 항의의 자세를 보이고, 유배된 나리치카에서 몰래 옷을 보내는 등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7월에 나리치카는 살해당했다.
 
시게모리는 나리치카의 딸을 적자 [[다이라 고레모리|고레모리]](維盛)의 처를 맞는 등 시게모리와 친밀한 관계였다. 시게모리는 나리치카를 고시라카와 법황에 대한 교섭 창구・중개역으로 중시하여, 법황에게 헤이시의 요구 사항을 전해주는 역할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 나리치카가 헤이시 타도의 주모자였기 때문에 시게모리는 완전히 체면을 구기고, 정치적인 지위도 실추되었다.
 
===종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