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책: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3번째 줄:
 
== 생애 초반 ==
《삼국지》손파로토역전에 따르면, [[손견]]이 처음 의병을 일으켰을 때, 손책은 어머니를 모시고 서-여강군 서현에 살면서 [[주유]](周瑜)와 함께 벗이 되었고, 사대부를 모아 합하여 장강과 회하 사이의 인심을 얻었다. [[손견]]이 죽자 곡아-고향인 오군 곡아현에 장사지내고, 강을 건너 강도-광릉군 강도현에 살았다. 그러나 당시 광릉군이 속해있던 서주목 [[도겸]](陶謙) 꺼림을달가워 받았으므로하지않아 어머니를 모시고 다시 곡아로 옮기고, 외숙 단양태수 [[오경 (후한)|오경]](吳景)에게 나아가 수백 명의 군사를 모았다. [[흥평]] 원년([[194년]]), [[원술]](袁術)을 따랐다. [[원술]]은 손책을 기이히 여기고 옛 [[손견]]의 부곡을 손책에게 돌려 주었다. 당시 태부 [[마일제]]가 절을 가지고 관동을강동을 안정시키고자 수춘에 있었는데, 손책을 예로써 부르고 표를 올려 회의교위로 임명했다. [[원술]]의 대장 [[장훈 (후한)|장훈]](張勳)과 [[교유]](橋蕤)가 손책에게 마음을 기울여 공경했고, [[원술]]도 손책 같은 자식이 있으면 죽어도 한이 없으리라며 탄식했다.
 
[[원술]]은 처음에는 손책을 구강태수로 임명하고자임명한다고 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진기]](陳紀)로 바꾸었다. 이후 여강태수 [[육강]](陸康)은 일찍이 손책이 만나고자 했을 때 주부로 대신 만나게 했으므로 손책의 원한을 샀고, [[육강]]이 [[원술]]의 군량 요구를군량요구를 묵살하자 [[원술]]은 [[육강]]을 토벌하고 그 땅을 차지하기로 결정하고 손책에게 [[육강]]을 치면 여강태수를 줄 것을 약속했다. 일찍이 손책이 [[육강]]을 만나고자 했을 때 본인이 아니라 자기 밑에 신하인 주부로 대신 만나게 했으므로 손책은 자신을 무시하였다고 여겨 그 원한이 있는 터였기에 이를 승낙하고 출정하였다. 그러나, 막상 손책이 [[육강]]을 무찌르자, [[유훈 (자대)|유훈]](劉勳)으로 여강태수를 삼았으므로 손책은 실망했다실망하여 이대로 밑에 있다가는 사나이로써의 큰 뜻을 이룰 수 없슴을 깨닫고 독립하기로 마음먹는다.
 
== 강동 정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