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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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아들의 재능을 눈여겨 본 그의 부모는 전라남도 [[목포시|목포]]로 이사를 했고, 중학교 진학을 위해 국민학교 4학년 때 하의도에서 목포북국민학교로 전학해 왔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어머니가 하의도의 집과 농토를 다 팔면서까지 아들을 목포로 유학시킨 것이다. 부모는 여관을 운영하면서 공부 뒷바라지에 나섰다. 그 뒤 목포제일보통학교를 일본인 학생들의 따돌림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학업에 전념하여 1937년 수석으로 졸업, 목포일보 사장상을 받았다. 1939년에는 당시 전국 10대 명문 안에 들었던 5년제 [[목포상업고등학교]]에 [[일본인]] 학생들까지 제치며 1등으로 합격하여 모친의 기대에 부응했다. 학생의 절반가량이 일본인인데도 입학해서 3학년 때까지 줄곧 반장을 할 정도로 뛰어난 통솔력을 보였다. 이때의 죽마고우로 뒷날 신민당 국회의원이 되는 [[임종기]]를 만나 평생의 벗으로 지내게 된다.<ref name="손세일"/>
 
그는 독서광이면서 정치와 영어에 관심이 많고 작문과 역사 성적이 뛰어났으며 웅변에도 소질을 보였다 한다. 목포상업고등학교시절 학적부에는 김대중에 대하여 “언변은 늘 정확, 명료하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탓인지 훗날 그는 서울에서 웅변학원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웅변학원에서 정치적 동지인 김상현과 만나게 된다. 그의 한 동창생의 말에 의하면, 한번은 일본인 교관이 전교생을 모아 놓고 시국에 대한 강연을 한 일이 있었다. 강연이 끝나고 교관이 질문이 있으면 하라고 하자 김대중만이 입을 열었다. 질문은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유럽 정세에 관한 것이었는데 교관은 답변을 하지 못하고 어물어물하여 창피를 당하고 말았다.<ref name="손세일"/> 김대중은 민족의식이 뚜렷했다. 그러나 학년이 높아지면서 일본인 학생들과 갈등을 빚으면서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한데다 반일작문이 문제가 돼 계속 맡아오던 반장마저 그만두게 되었다.<ref>[http://breaknews.com/sub_read.html?uid=108854&section=sc1 벌써 그립다 민족의 영웅 김대중 전대통령] 브레이크뉴스 2009.08.25일자</ref>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일제에 의해 '''도요타 다이주'''({{llang|ja|豊田大中}})로 [[일본식 성명 강요|창씨개명]]을 했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일본에 올 때마다 목포상고 재학시절의 은사에게 이 이름을 사용했다고 [[아사히 신문]]은 보도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0077661 말뿐인 '정쟁중단' 與 '친일시비' 잇단 공격]</ref>
 
==== 청년사업가 시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