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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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가 반탁운동이 시작되면서부터 우익단체를 통합하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하고, 이승만측과의 계속 갈등, 대립한 이유는 중경임시정부의 현실화에 그 목적이 있었다.<ref name="yunbi529"/>
 
==== 이승만, 한민당과의 합작 실패 ====
[[파일:Jangdeoksu 1945.jpg|thumb|right|200px|[[장덕수]]. 재령 보강학교 당시 그의 제자이기도 했다.]]
 
[[1947년]] [[12월 2일]] [[장덕수]]가 자택에서 피살되자 김구는 그 배후로 지목되었다. 장덕수는 1947년 12월 2일 저녁 6시15분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현직 경찰이던 [[박광옥]](朴光玉)과 초등학교 교사였던 배희범 등 5명이 쏜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12월 4일]] [[미군정]] 경찰은 [[박광옥]]과 [[배희범]]을 체포하였다. 용의자 6명은 장덕수를 암살할 목적으로 1947년 8월 창단된 [[대한혁명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임정]]을 절대지지하는 [[대한학생총연맹]]의 간부 또는 맹원들이기도 했다. [[대한학생총연맹]]은 47년 6월 [[운현궁]]에서 발족되었는데 김구를 총재, [[조소앙]]과 [[엄항섭]]을 명예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ref name="아아아앙">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6쪽. </ref> [[박광옥]]은 [[종로경찰서]]의 경사로 근무하는 [[경찰관]]이었고, [[배희범]]은 초등학교 교사로 모두 [[한국독립당|한독당]] 당원이었다.
 
[[미군정]]청 [[경찰]]은 김구가 이끄는 [[국민회의]] 간부 10여명을 연행하는 등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였다. 우파정당 통합에서 한민당은 빠졌는데 그 중 [[한국독립당]]과의 통합을 가장 반대하던 사람이 [[장덕수]]였다. 이 점이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는 시각에 무게를 더해주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민당의 [[김성수 (1891년)|김성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을 찬성하였으나 [[장덕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은 당을 임정 요인들에게 헌납하는 것이라며 주장하였다.<ref name="아아아앙"/><ref> 박태균, 《현대사를 베고 쓰러진 거인들: 해방정국과 4인의 요인 암살, 배경과 진상》(지성사, 1994) 123~124쪽. </ref><ref name="kang67">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7쪽. </ref> 미소공위 참여에 대해서도 공위참가에 반대하던 김구와 찬성하던 [[장덕수]] 사이에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ref name="아아아앙"/> 용의자들은 재판에서 장덕수가 정권을 잡기 위해서 신탁을 시인하는 미소공위에 참가할것과 해방전 공산당은 민족주의자들로 조직되었는데 장덕수는 그때 [[공산당]]의 이론가였다는 것, 일본헌병대의 촉탁인 국민총연맹의 고문으로 학생들을 격려하여 학병을 장려하는 등 친일적 행동을 한 것이 암살 동기라고 주장하였다.<ref name="kang67"/><ref> 박태균, 《현대사를 베고 쓰러진 거인들: 해방정국과 4인의 요인 암살, 배경과 진상》(지성사, 1994) 126쪽. </ref>
 
=== 생애 후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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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 [[2009년]] [[6월 26일]] 소지품인 회중 시계, 유묵 작품 3점, 인장(印章) 3점 및 피살 당시 착용한 혈의(血衣)가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등록문화재]] 439호~442호로 등록
 
== 의혹과 논란 ==
=== 반(反) 이승만 쿠데타 기도 의혹 ===
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그가 쿠데타를 계획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김구는 [[이승만]] 정부를 전복할 쿠데타를 기도하였다는 의혹이 여러 번 제기되었다. [[이범석 (1900년)|이범석]]은 그가 극좌파와 손잡고 정부 전복을 기도한다고 주장했다.<ref name="여순1"/> 그리고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고 [[여순 사건]] 당시 극우 정객이 극좌파와 손을 잡고 정부 전복을 기도한다고 하여 그를 사건의 배후로 지목했다.<ref name="여순2"/> 그러자 김구는 [[조선일보]]에 사설을 발표, 여순 사건에 극우 관련운은 이해난(이해하기 어렵다)고 맞받아쳤다.<ref name="여순2"/> 그러나 이후에도 김구의 쿠데타 준비설은 계속 나타났다.
 
국군 내에는 이승만을 축출하고 김구를 추대하려는 세력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미국]] 정보기관 CIC는 김구를 정부 전복 쿠데타를 기도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미국]]의 첩보기관 CIC의 보고에 의하면 [[1949년]] 그는 [[염동진]]과 손잡고 이승만 정부를 전복할 쿠데타를 기도하였다고 보고하였다.
 
'북한의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에서 소요와 폭동이 있은 직후 우익 군사파벌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의형성 단계에 김구와 [[염동진]]이 개입한 증거<ref name="dsa1">[http://news.donga.com/3/all/20010904/7733898/1 김구 암살 관련 美 정보문건 전문] 동아일보 2001년 09월 04일자</ref>' 가 미군 방첩대에 입수되었다. 한편 창원대 교수 [[도진순]]은 '염동진이 김구를 추종하는 우익 장교들의 내부 동향을 CIC 요원에게 제공하였다는 것'으로 보기도 했다.<ref name="yum11"/>
 
한편 대한민국 국군 창군 주역 중 제4연대 소속 장교들은 정부에 불만을 품고 김구를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세울 계획을 짜기도 한다. '제4연대 장교들의 참모회의 과정에서 김구를 수반으로 하는 보다 군사적 유형의 정부가 수립되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여러 차례 토로되었으며, 그럴 가능성이 존재한다.<ref name="dsa1"/> 이에 따르면 이 정부는 김구의 파시스트형 정부에 합류할 북한군 내부의모든 친소장교들에 대하여 즉각적인 배척을 야기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많은 장교들과 경찰관리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 요원은 이승만 배후에 미국의 세력, 권력과 위신 때문에 비록 현재는 이승만 정부가 요구되지만, 이러한 유형의 정부는 결코 한국의 통일문제를 해결하거나, 한국이 재건하고 군사적 기반을 통하여 국가들 중의 국가가 되도록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ref name="dsa1"/>'는 것이다.
 
북한의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에서 소요와 폭동이 있은 직후 우익 군사파벌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의 형성 단계에 김구와 [[염동진]]이 같이 관여<ref name="yum11"/>하였다. [[염동진]]과의 쿠데타 기도는 곧 미군 방첩대와 당시 [[대한민국|남한]] [[국무총리|총리]]인 [[이범석 (1900년)|이범석]]의 귀에도 들어가게 됐고, 염동진과 김구의 쿠데타 시도 관련 문건이 미국 방첩대에 전달되면서 그 내용이 외부로 알려지기도 했다.
 
[[염동진]]은 김구와 비밀 연락과 접촉관계를 갖고 있었다. 염동진은 [[대한민국 국군|한국군]] 내부에 존재하는 [[우익]] 반대파(Rightist dissidents)의 통신을 김구씨에게 전달해주는 매개자역할을 해왔다.<ref name="dsa1"/> 그런데 염동진이 국군내 자료를 김구에게 전달하고, 군내 불만세력과 김구의 사이를 연결 목적으로 작성한 서신이 미군정 방첩대로 빼돌려지기도 했다.
 
이 군대내 파벌은 고급 장교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국 내 CIC 사령부에 제출되는 보고서들은 비밀로 분류되었다. 한번은 제출되는 정보들을 보호하기위한 보안장치들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인 요원들을 매개로 해서 내 자신이 점검을 해본 일이 있었다.<ref name="dsa1"/> 한 건의 비밀보고서가 실질적으로 [[대한민국 국군|한국경비대]](국군) 정보참모부(G-2)에 뿌려졌고 김구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ref name="dsa1"/> 이후 이 문서는 미군정 방첩대 수중에 들어간다.
 
그 후에 문서화된 보고서들이 전달되지는 않았으나, 구두 보고들이 한국주재 [[CIC]] 사령부 정탐과 책임장교와 전라남도 지구 CIC 사무소 광주 책임장교에게 이루어졌다.<ref name="dsa1"/> 그러나 한편으로 염동진이나 백의사는 광복 이후 백범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독자적으로 활동하였으며<ref name="yum11"/>, “[[염동진]]이 김구씨에 대해서는 때때로 격렬한 비난을 가하면서도 동시에 군사적 견지에서 김구의 장점과 가능성을 격찬한다”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염동진은 때때로 김구에 대해 비판적이기는 했으나, “염동진의 김구에 대한 비판은 중국에서 그의 독립운동을 인정하지 않는 이승만 정부 인사들에 대한 증오에 미치지는 않는다”는 바로 다음 구절을 보면 당시 염동진은 적어도 [[이승만]] 정부측보다는 김구측을 더 선호하였던 것은 분명하다.<ref name="yum11"/>
 
[[염동진]]은 김구-[[우익]]의 A급 정보를 미군 CIC에 전달하는 주요 정보원으로 등장한다. 그의 의도는 [[우익]] 쿠데타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미군]]은 그것을 반대로 활용하였다.<ref name="yum12">[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5/01/11/200501110500023/200501110500023_2.html “핵심은 金九쿠데타 기도설, 염동진 배후설은 근거없다” <백범 암살관련 美발굴문서 완전분석> - 신동아] 2001 년 10 월 01 일 (통권 505 호)</ref>
 
=== 안준생 암살 사주 ===
[[1945년]] [[8월]] 귀국 직전 그는 [[안중근]]의 차남 [[안준생]]을 암살하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 중국 관헌에게 부탁하였으나 관원들이 실행치 않았다.<ref name="rlarflq408"> {{서적 인용
|저자=김구
|제목=백범일지
|발행일자=초판 1997-7-25, 개정판 2002-8-1
|꺾쇠표=《》
|출판사=돌베개
|출판위치=경기도 파주
|id=ISBN 89-7199-148-8
|쪽=408쪽}} </ref>'는 것이다.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ref name="rlarflq408"/>고 부탁했고, 부탁의 사유로는 '안준생은 왜놈을 따라 본국에 돌아와 왜적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伊藤博文)에게 부친 의사의 죄를 사하고, 미나미 지로 총독을 애비라 칭하였다.<ref name="rlarflq408"/>'고 했다. [[안중근]] 사후 생계의 곤란을 겪던 [[안준생]]은 [[조선총독부]]에 사과를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미나미를 아버지라 했다는 근거는 불확실했다. 그러나 그의 [[안준생]] 암살 부탁은 중국 관원으로부터 거절당했다.
 
=== 안공근 암살 의혹 ===
{{참고|안공근 피살 사건}}
[[1939년]]에 실종, 암살된 [[안공근]]의 살해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다. 실제로 해방 뒤에도 독립운동가의 후손들 중에는 김구의 측근이었던 모 독립운동가가 안공근을 납치,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했다는 의혹이 널리 언급되었다.
 
[[1932년]] 이후 김구는 그의 최측근 중 한사람이었던 [[안공근]]과 여러 번 마찰을 빚었는데, 그뒤 [[안공근]]은 [[1939년]] [[5월 30일]] 상하이에서 실종, 피살되었다. [[안공근]]은 한때 김구의 측근이었으나 일본군이 점령한 난징에서 형수(안중근의 처)를 모셔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김구로부터 심히 질책받았고, 임정의 자금 중 일부를 개인적으로 쓴 일과, 도박으로 자금을 탕진한 일이 있었다. [[안공근]]은 김구의 심한 질책을 받고 임정 이동 대열에서 이탈하였다. 그밖에 [[안공근]]은 임정의 자금을 유용했다는 의혹을 받기도했다. 김구는 [[안공근]]에게 부여된 [[임시정부]] 및 [[한인애국단]]의 대외 연락업무를 [[박찬익]]에게 맡겼다. 이후 안공근은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중 상하이의 한 부두에서 사라졌었다.
 
안공근은 의문의 실종을 당했고, 이후 김구의 최측근 인사인 모 독립지사의 후하들이 안공근을 제거했다는 의혹<ref name="ah1">오영섭, 한국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 (경인문화사, 2007) 302페이지</ref>이 독립운동가 후손들 사이에서 널리 언급되고 있다.<ref name="ah1"/>
 
=== 김립 무고 의혹 ===
{{본문|김립 암살 사건}}
1922년 초기에 상하이 임시정부가 한인사회당의 간부인 김립(1880~1922)을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한 데 이어 김구 부하인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이 1922년 2월11일에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립을 사살했다.<ref name="han21515">[http://h21.hani.co.kr/section-021109000/2007/04/021109000200704120655080.html ‘정당한 폭력’은 정당한가] 한겨레 21 2007년04월12일 제655호</ref>
 
그는 백범일지에서 김립이 [[레닌]]에게서 지급받은 금괴로,'북간도 자기 식구들을 위하여 토지를 매입하였고,<ref name="rlarflq311"> {{서적 인용
|저자=김구
|제목=백범일지
|발행일자=초판 1997-7-25, 개정판 2002-8-1
|꺾쇠표=《》
|출판사=돌베개
|출판위치=경기도 파주
|id=ISBN 89-7199-148-8
|쪽=311쪽}} </ref> 이른바 공산주의자라는 한인·중국인 인도인에게 얼마씩 지급하였다.<ref name="rlarflq311"/> 그러고서 자기는 상하이에 비밀리에 잠복하여 광동여자를 첩으로 삼아 향락하는 것이었다.<ref name="rlarflq311"/>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레닌이 준 자금을 김립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적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ref name="han21515"/>는 반론도 있으며, 그가 중국 여자를 첩으로 삼고 향락을 즐겼는가 여부는 뜬소문이라는 반론도 있다.
 
[[블라디미르 레닌|레닌]]이 [[한형권]], [[김립 (1880년)|김립]] 등에게 준 자금은 [[한인사회당]] 내지는 사회주의 정당 건설의 공작금으로 지급된 자금이었다. 이들은 자금을 실제 활동비와 한국인 사회주의자들에게만 분배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측에는 내놓지 않았다.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교수 [[박노자]]에 의하면 이 암살을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한 <백범일지>의 권위가 절대적이기에 김립이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는 통설을 의심한 이들이 여태까지 거의 없었지만<ref name="han21515"/> 그는 한국외대 반병률의 주장을 인용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한국외국어대학교|한국외대]] [[반병률]]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 레닌 정부의 바람대로 김립과 그 동지들이 세 차례에 걸쳐 수만루블의 자금을 한인사회당에 어렵게 운반해주어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쓰게 했지만, 그 자금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적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ref name="han21515"/> [[박노자]]는 이를 두고 '동족 테러'라고 비판했다.<ref name="han21515"/> 그에 의하면 자금 문제를 놓고 그 뒤에도 우파 민족주의자들에게 '동족 테러' 가 빈번히 이용됐다는 사실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무장 독립운동의 비극적인 이면<ref name="han21515"/>이라는 것이다.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김립 (1880년)|김립]]이 사치, 향락을 하고 광동인 첩을 사서 즐겼다고 하였으나, [[김립 (1880년)|김립]]이 축첩을 했다는 근거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 만주 폭격 계획 의혹 ===
해방 직후 그는 [[만주]] 폭격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미국 제1군사령부 정보장교인 조지 실리 소령의 보고서는 김구와 [[염동진]]은 [[만주]] 지역의 폭격을 계획한 '''만주계획'''을 세웠다 한다.<ref name="min1">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824</ref> 만주 폭격 계획은 [[1947년]] 말 ~ [[1948년]] 초에 여러 차례 김구가 강조한 만주에서의 군사계획이었다. 이때 김구, [[이청천]], [[이범석]]<ref name="min1"/> 등은 북한을 폭격할 계획을 세운다.
 
김구 등은 '중국 국민당 지역에서 활동했던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북을 무력공격할 뿐만 아니라 중국 내전에서 [[장졔스]]의 중국 군대와 동맹해 한·중의 공산주의 세력을 소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구상은 종국적으로 동북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격멸한다.<ref name="min1"/>'는 것이었다. 즉 남·북·만주가 포함된 이 계획은 한국·중국·미국의 동아시아 삼각 반공 군사 동맹 체제의 수립<ref name="min1"/> 계획이었다. 그러나 [[김구]]가 남북협상에 참여하면서 조직원들이 떨어져나가면서 타격을 받았고, 인력과 장비의 부족 등의 다양한 원인으로 이후 김구의 암살로 만주 폭격 계획은 실패, 백지화된다.
 
=== 김성수 암살 기도 의혹 ===
[[송진우]], [[장덕수]] 등의 암살 배후 의혹 외에도 [[김성수 (1891년)|김성수]] 암살 미수의 배후로도 지목되었다.
 
[[미 군정]]의 보고서<ref>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6) 532</ref>에 의하면 김구는 [[김성수 (1891년)|김성수]]의 암살을 기도<ref name="seo535">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535</ref>해왔다 한다. 그는 [[한민당]]과 [[한독당]]의 통합에 찬성<ref name="kang66"/>하였지만 김구측에 의한 [[김성수 (1891년)|김성수]] 암살 기도<ref name="seo535"/>가 미수로 끝나면서 [[한민당]]측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을 노골적으로 증오하게 되었다.
 
=== 민간인 살해 논란 ===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쓰치다 조스케]]를 [[일본]] [[군인]]이라고 기술하였으나<ref name="baik01"/>, 계속 민간인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2003년]] [[11월]] 말 [[김완섭]]은 [[서울특별시|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방문, 국회 과거사진상규명특위 공청회에서 “김구 선생은 ‘민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한 뒤 중국으로 도피한 조선 왕조의 충견(忠犬)”이라는 내용의 문건을 배포<ref name="kimk1">[http://news.donga.com/3/all/20040727/8088232/1 ‘김구선생 명예훼손’ 작가 김완섭씨 기소] 동아일보 2004년 7월 27일자</ref>하였다. 또한 그는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ref name="무고1">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51135&EVEC 뉴라이트와 현 정부에 조롱당하는 김구 주석 - 오마이뉴스] </ref>는 내용의 인쇄물도 배부하였다. 문건을 받아 본 일부 국회의원과 시민들은 즉석에서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고, 일부는 이를 근거로 [[검찰]]에 들고가 그를 고소했다.
 
[[2004년]] [[7월]] [[검찰]]은 공소장에서 “김구 선생이 [[1896년]] [[10월]] [[황해남도|황해도]] [[안악군]] 치하포항에서 살해한 ‘쓰치다’는 당시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군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김구 선생이 쓰치다를 처단한 뒤 체포돼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가 1919년 중국으로 망명했는데도 도주한 것처럼 허위 사실을 적시했다”고 밝혔다.<ref name="kimk1"/> 이어 그는 서울고검으로부터 불구속 기소 처분을 받았다. 서울고검 정현태(鄭現太) 검사는 [[7월 27일]] 그를 백범 김구(金九) 선생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소설 ‘친일파를 위한 변명’의 작가 김완섭씨를 불구속 기소했다고 언론에 밝혔다.<ref name="kimk1"/> 또한 서울고검은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한 문건을 배포한 친일작가 김완섭씨를 허위사실로 인한 명예훼손으로 직권 기소한 바 있다. 서울고검의 [[검사]] 정현태는 김완섭에 대한 기소는 [[국사편찬위원회]]와 [[국가보훈처|보훈처]]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고 나서 내린 결정이었다<ref name="무고1"/>고 밝혔다.
 
그러나 [[1987년]] [[창원대학교]] 교수 [[도진순]]이 찾아낸 일본 외무성 자료에 의하면 [[쓰치다 조스케]]는 [[계림장업단]] 소속 상인<ref name="kyunghang01"/>으로 밝혀졌다.
 
=== 주애보와의 관계 ===
김구는 [[이봉창]] 의거와 홍구공원 사건을 계기로 피신해 있었다. 이 피신기간 중 중국 국민당 관계자가 소개시킨 미혼의 뱃사공 주아이바오(주애보)와 부부와 같은 생활을 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러나 주아이바오와의 사이에서 자녀의 존재 여부는 알수 없다.
 
== 평가와 비판 ==
=== 당대의 여론 ===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18%가 김구를 지목하였다.<ref name="이정식226">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26~228쪽 참조. </ref> 그뒤 11월 선구회에서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 때는 1957명 중 293명이 김구를 지목하여 2위로 집계되었다.<ref name="이정식226"/> 한편 최고의 혁명가를 꼽는 설문에서는 978명 중 156표를 얻어 4위였다.<ref name="이정식226"/> [[1946년]] [[7월]] 조선 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대통령에 적합한가를 조사한 설문결과에는 702표로 전체의 10.5%를 확보했다 한다.<ref name="이정식226"/>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누가 초대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가?)에서는 568표로 2위를 하였다.<ref name="이정식226"/>
 
=== 미국의 시각 ===
[[미국]]에서는 그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미국]]은 그를 [[파시스트]]<ref>[http://news.donga.com/3/all/20010904/7733898/1 김구 암살 관련 美 정보문건 전문] 동아일보</ref>로 보고 있었다.
 
[[미군정]]은 무자비하고(ruthless), 파렴치한(unscrupulous<ref name="비평11">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2:1948~1950 민주주의·민족주의 그리고 반공주의》 (역사비평사,1996) 249페이지</ref>) 인물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미국]]은 그를 '''기회주의자'''(opportunist)로도 묘사하였다.<ref name="비평11"/>
 
[[미군정]]은 [[1945년]] [[송진우]] 암살 당시 그를 송진우의 암살배후로 봤고<ref name="songam1"/>, 미군정 외에도 미국에서는 그를 송진우의 암살 용의자로 봤다.<ref name="커밍스1"/> [[1947년]] [[12월 8일]] [[장덕수]]가 암살당했을 때 현장에서 검거된 박광옥과 배희범은 각각 현직 군정청 경찰관과 현직 초등학교 교사였지만, [[한국독립당|한독당]]의 당원이기도 했다.
 
미국 제1군사령부 정보장교인 조지 실리 소령의 보고서는 [[염동진]]은 김구에 대해 격렬한 비난을 가하며 동시에 군사적 견지에서 김구의 장점과가능성을 격찬한다는 점이다.<ref name="dsa1">[http://news.donga.com/3/all/20010904/7733898/1 김구 암살 관련 美 정보문건 전문] 동아일보 2001년 09월 04일자</ref> 그 민간인은 김구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면 일본과 미국이 훈련시킨 200만의 한국군을 갖게될 것이며, 필요한 경우 이 한국 군인들은 그를 따라 38선을 넘을 것이라고 했다.<ref name="dsa1"/>
 
=== 평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