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무공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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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4년]] 선조 37년 [[6월 25일]]에 내린 공신록은 당시 공을 평가하는 기관인 공신도감의 당상관인 호성공신 1등 [[이항복]]과 그의 장인인 선무공신 3등 [[권율]]을 중심으로 공이 과대하게 포장된 흔적이 있다. 우연찮게도 사위와 장인이 나란히 1등공신에 올라가 있으며, 선무공신에는 안동권씨 가문의 [[권준 (1541년)|권준]]과 [[권협]]이 3등에 포함되어 있다. 선무 1등 공신인 [[원균]]은 [[칠천량 해전]]의 엄청난 패배에도 불구하고 1등 공신에 제수되었다.
 
[[1597년]] [[음력 7월 11일]] 도원수 권율은 조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싸우지 않는다 하여 파직당한 [[이순신]]의 후임으로 온 원균조차 불리한 상황으로 인해 출전하지 않자 [[원균]]과 [[원사웅|그의 아들에게아들]]에게 태형을 가해 억지로 출전시킴으로서 엄청난 손실을 입고 패배하게 한 당사자 임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을 덮기 위해 원균까지 1등 공신에 추증하였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ref> {{뉴스 인용
|제목 = 원균이 권율에게 곤장을 맞은 까닭은
|url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18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