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학 (1821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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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장령(掌令)·사간 등 삼사의 언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아래에서 대사헌․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흥선군]]은 그의 딸과 그의 일족 [[김병문]]의 딸 등을 며느리로 삼겠다고 약속하였으나 고종 즉위 후 세도가문 출현을 우려하여 김문과의 혼약을 모두 취소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집권으로 안동김씨 일문이 거의 제거되었으나, 불우한 처지에 있던 [[흥선대원군]]을 극진히 대우하여, 고종 즉위 이후에도 계속 요직에 등용되어 64년 이조판서, 뒤에 좌의정으로 승진되었다. [[김좌근]] 등과 함께 철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여 실록총재관으로 《철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대원왕의 명을 받아 찬집소(纂集所) 총재관으로 조두순(趙斗淳)·이유원(李裕元)과 함께 대전회통 편찬에 참여하여 《[[대전회통]]》 간행을 지휘하였다.
 
보수적 척화론자로서, [[흥선대원군]]이 [[가톨릭]]을 이용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였으며 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금지를 적극 주장하였다. 대원군이 인심을 잃고 실각한 이후, 의정부영의정을 거쳐, 75년 영돈녕부사가 되었으며, 일본의 의도를 간파하여 [[강화도 조약|한일수호조약]] 체결을 극력 반대하였다.
 
== 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