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해군: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자녀억류설은 날조된 것 |
|||
1번째 줄:
'''임해군'''(臨海君, [[1574년]]~[[1609년]])은 [[조선]] 중기 왕자, 왕족으로 [[조선 선조]]의 맏아들이자, [[광해군]]의 형이다. [[공빈 김씨]] 소생이며 이름은 진(珒)이다. [[임진왜란]] 당시 [[순화군]]과 함께
== 생애 ==
=== 생애 초반 ===
[[선조]]와 [[공빈 김씨]](뒤에 [[공성왕후]]로 추존)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서장자였다. 3세 때에 어머니 [[공성왕후]]를
=== 임진왜란 중 ===
이후 임해군은 몇 차례의 포로협상으로 풀려났으나, 그 후에도 민가에 피해를 끼치거나
=== 광해군의 즉위와 최후 ===
1608년에 광해군이 즉위하자
광해군은 명나라의 국내 사정과 교묘하게 맞물려 세자 책봉과 즉위에 대한 명나라의 승인 과정이 순탄치 못했는데, 명나라는 선조의 서장자 임해군을 두고 차자인 광해군을 책봉하는 것에 대하여 문제를 삼았고, [[광해군]]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거액의 뇌물을 주고 간신히 [[명나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 후 이를 구실로 왕위를 위협하려는 세력들이 대두할 경우를 우려한 광해군은 임해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내었다가 대북의 [[이이첨]] 등의 일당과 비밀리에 결탁하여 임해군을 살해하였다.
=== 사후 ===
임해군을 지키던 군사들은 임해군의 죽음을 병사라고 보고했으나, 1623년 [[인조 반정]] 후 재조사에 들어간 결과 [[이이첨]]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한
=== 자녀 억류설 ===
임해군의 자녀들은 가토 기요마사에 의해 일본에 억류돼 승려가 되거나 일본 장수의 부인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당시 억류된 왕족은 광해군과 순화군<ref>선조실록 31권, 선조 25년 10월 19일, 경성판관 [[이홍업]]이 가져온 가토의 편지에서도 '''두 왕자와 관원들에 대해서만 언급되고 왕손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다.''' 실제로 왕손을 잡았다면, 편지의 목적상 왕손도 볼모로 잡았다고 언급할만한도 한데, 서신에는 왕자들의 내용밖에 없다. 또한 가토의 편지 외에도 북병사(北兵使) 한극함(韓克諴), 남병사(南兵使) 이영(李瑛),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 순화군(順和君) 이보(李),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 김귀영(金貴榮), 장계 부원군(長溪府院君) 황정욱(黃廷彧), 전 호군(護軍) 황혁(黃赫)등이 포로 상태에서 보낸 편지에서도 왕손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ref>이며 이후 언급 자체가 전혀 없으므로 자녀 억류설은 사실성이 없다.<ref>이후 인조 실록에서도 광해군의 죄악상에 관련한 부분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으므로 사실무근한 날조라고 본다. 이런 주장은 가토의 공적을 부풀리는 야사에 근거한다고 본다.</ref>
== 주석 ==▼
<references/>▼
== 관련 항목 ==
줄 35 ⟶ 33:
*[[김유석]] - 2003년 [[SBS]] 《[[왕의 여자]]》
▲== 주석 ==
▲<references/>
[[분류:임진왜란 관련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