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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억류설은 날조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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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해군'''(臨海君, [[1574년]]~[[1609년]])은 [[조선]] 중기 왕자, 왕족으로 [[조선 선조]]의 맏아들이자, [[광해군]]의 형이다. [[공빈 김씨]] 소생이며 이름은 진(珒)이다. [[임진왜란]] 당시 [[순화군]]과 함께 병력왜군에게 파견의사로 임무를잡혔다가 맡았으나 주민들을 약탈하다가 일본군에게 사로잡히기도 했다풀려났다. 후일 동생 [[광해군]]의 즉위 후 역모 혐의를 받고유배지에서 사형되었다사망했다.
 
== 생애 ==
=== 생애 초반 ===
[[선조]]와 [[공빈 김씨]](뒤에 [[공성왕후]]로 추존)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서장자였다. 3세 때에 어머니 [[공성왕후]]를 잃었으며,잃었다. 임해군은 그는성격에 성격이문제가 난폭하여있어 세자로 책봉되지 못하고 그의 동생 [[광해군]]이 세자가 된다됐다. [[1585년]] 허명(許銘)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ref>선조실록 19권, 선조 18년(1585 을유 / 명 만력(萬曆) 13년) 4월 17일(무오) 5번째기사 "임해군 이진이 허명의 딸을 맞아들이다"</ref> 그의 유일한 후견인이었던 외조부 [[김희철]]도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전사하고 만다.
 
=== 임진왜란 중 ===
임해군은 성격이 본래부터 난폭하고 횡포하기로 유명하였다. [[임진왜란]]때에는 동생 [[순화군]]과 함께 [[함경도]]로 떠나 병력을 모으는 임무를 맡게 되었는데,되었다. 그곳에서하지만 주민들을민가를 살해하고약탈하고 돈을주민을 빼앗는살해하는 등의 횡포를일로 수차례반감을 저질렀다샀다. 결국 임해군은선조 분노가25년 폭발한7월 23일, 임해군과 순화군은 함경도 주민들을 비롯한 [[순왜]] 반역자 [[국경인]]에게 · [[국세필]] 등에게 포박되어 왜장 [[가토 기요마사]]한테 볼모로 붙잡히는 수모를 겪기도에게 하였다넘겨졌다.
 
이후 임해군은 몇 차례의 포로협상으로 풀려났으나, 그 후에도 민가에 피해를 끼치거나 양민들을 취미삼아주민들을 죽였다. 결국이러한 일들로 임해군은 이런저런 횡포를 부려왔기 때문에 선조의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왕세자로 책봉되지 못했다.
 
=== 광해군의 즉위와 최후 ===
1608년에 광해군이 즉위하자 불평불만을불만을 터트렸는데노골적으로 이 불만이 누설되어드러내다가, [[1609년]] [[대북]]으로부터 여러번 탄핵을 받은 뒤 역모 혐의를 받고 사형당했다.
 
광해군은 명나라의 국내 사정과 교묘하게 맞물려 세자 책봉과 즉위에 대한 명나라의 승인 과정이 순탄치 못했는데, 명나라는 선조의 서장자 임해군을 두고 차자인 광해군을 책봉하는 것에 대하여 문제를 삼았고, [[광해군]]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거액의 뇌물을 주고 간신히 [[명나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 후 이를 구실로 왕위를 위협하려는 세력들이 대두할 경우를 우려한 광해군은 임해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내었다가 대북의 [[이이첨]] 등의 일당과 비밀리에 결탁하여 임해군을 살해하였다.
 
=== 사후 ===
임해군을 지키던 군사들은 임해군의 죽음을 병사라고 보고했으나, 1623년 [[인조 반정]] 후 재조사에 들어간 결과 [[이이첨]]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것<ref>광해군의 밝혀졌고지시에 의한 독살설도 있으나, 역적으로단지 몰려야광해군을 했던모멸하기 위한 조작이라고 본다.</ref>으로 밝혀졌다. 이후 임해군은 [[조선 인조|인조]]의 명으로 복권되었다역적 혐의에서 벗어났다.
 
=== 자녀 억류설 ===
그의 자녀들은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 의해 일본에 억류돼 승려가 되거나 일본 장수의 부인이 되는 비운을 겪게된다.
임해군의 자녀들은 가토 기요마사에 의해 일본에 억류돼 승려가 되거나 일본 장수의 부인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당시 억류된 왕족은 광해군과 순화군<ref>선조실록 31권, 선조 25년 10월 19일, 경성판관 [[이홍업]]이 가져온 가토의 편지에서도 '''두 왕자와 관원들에 대해서만 언급되고 왕손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다.''' 실제로 왕손을 잡았다면, 편지의 목적상 왕손도 볼모로 잡았다고 언급할만한도 한데, 서신에는 왕자들의 내용밖에 없다. 또한 가토의 편지 외에도 북병사(北兵使) 한극함(韓克諴), 남병사(南兵使) 이영(李瑛),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 순화군(順和君) 이보(李),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 김귀영(金貴榮), 장계 부원군(長溪府院君) 황정욱(黃廷彧), 전 호군(護軍) 황혁(黃赫)등이 포로 상태에서 보낸 편지에서도 왕손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ref>이며 이후 언급 자체가 전혀 없으므로 자녀 억류설은 사실성이 없다.<ref>이후 인조 실록에서도 광해군의 죄악상에 관련한 부분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으므로 사실무근한 날조라고 본다. 이런 주장은 가토의 공적을 부풀리는 야사에 근거한다고 본다.</ref>
 
== 주석 ==
<references/>
 
== 관련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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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석]] - 2003년 [[SBS]] 《[[왕의 여자]]》
 
== 주석 ==
{{토막글|조선}}
<references/>
 
[[분류:임진왜란 관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