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해군

임해군(臨海君, 1572년 음력 8월 14일 ~ 1609년 음력 4월 29일)은 조선의 왕자이며, 선조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공빈 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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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해군
臨海君
지위
조선 선조의 왕자
이름
이진(李珒)
신상정보
출생일 1572년 8월 14일(1572-08-14)
사망일 1609년 4월 29일(1609-04-29) (36세)
사망지 조선의 기 조선 경기도 교동군
부친 선조
모친 공빈 김씨
배우자 군부인 양천 허씨
자녀 슬하 3남 1녀
장남 이태웅
차남(양자) 창원군(경창군의 아들)
삼남(양자) 양녕군(경창군의 아들)

개요편집

(李), 이름은 (珒)이고 아명은 진국(鎭國)이며, 본관전주(全州)이다.

정원군, 순화군 등과 더불어 난폭한 행동을 일삼고 관료를 살해하는 등의 광패한 행동을 일삼았지만 선조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북인의 탄핵을 받고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사사되었다.

생애편집

초기편집

1572년(선조 5년) 8월 14일, 선조(宣祖)와 공빈 김씨(恭嬪 金氏)의 맏아들로 태어났다.[1] 그러나 임해군이 여섯살 되던 무렵, 어머니인 공빈 김씨는 임해군과 광해군 형제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1585년(선조 18년), 허명(許銘)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1591년(선조 24년) 광해군, 신성군, 정원군, 순화군 등과 함께 광국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책록되었다.

임진왜란편집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임해군을 제치고 둘째 아들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는데, 임해군의 성격이 방탕하고 포악했기 때문이다. 임해군은 왕명을 받고 이복 동생 순화군과 함께 근왕병을 모으기 위해 함경도로 떠났다.[2]

7월 23일,[3] 임해군과 순화군은 함경도 회령에서 지역 주민들을 비롯한 순왜 국경인 · 국세필 등에게 포박되어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졌다.[4] 이후 임해군은 몇 차례의 포로협상 끝에 풀려났다. 임해군과 광해군 형제의 외조부인 김희철 또한 왜란 중에 전사하였다.[5]

왜란 이후편집

임해군은 왕자의 신분을 이용하여 교만하고 난폭하게 행동하였으며, 심지어 임해군이 부리는 시정잡배와 가노들 또한 오만방자하게 행동하여 여러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무고한 사람을 폭행하거나 사소한 원한이 있는 자를 살해하는 등 광패한 행동을 일삼아 대간과 삼사 사헌부가 임해군의 죄를 묻고 강하게 처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선조는 이를 묵살하였다. 이후에도 임해군과 정원군, 순화군은 끊임없는 탄핵을 받았으나 선조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역모 혐의편집

광해군이 즉위하자, 임해군의 처벌과 추국을 요청하는 상소가 연이어 올라왔다. 임해군이 사병을 양성하고 있으니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에 따라 진도에 안치되었다가 교동으로 이배되었다.[6] 이후 의금부는 광해군의 지시에 따라 역모 혐의의 관련자들을 추국했으며, 양사는 임해군을 비롯한 기자헌, 이흥로(李弘老) 등을 처단해야 한다고 9번이나 재차 진언했다.[7] 또한 홍문관도 차자를 올려 임해군의 사형을 진언했으나, 광해군은 이를 끝까지 윤허하지 않았다.[8] 그 후, 임해군은 교동으로 다시 유배 되었다.[9]광해군일기》에 따르면 교동으로 유배된 이듬해에 그를 지키던 수장 이정표가 강제로 독약을 마시게 했으나, 인조반정 이후 임해군의 노비가 증언함으로써 임해군이 목이 졸려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사후편집

임해군을 지키던 군사들은 임해군의 죽음을 병사[10][11][12] 라고 보고했으나, 1623년 인조 반정 후 재조사에 들어간 결과 이이첨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결론지었다.[출처 필요] 이후 임해군은 인조의 명으로 복권되었다.[13]

자녀 억류설편집

임해군의 자녀들은 가토 기요마사에 의해 일본에 억류돼 승려가 되거나 일본 장수의 부인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당시 억류된 왕족은 임해군과 순화군[14]이며 사료에 왕손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으므로 자녀 억류설은 사실성이 없다.[15]

가족 관계편집

관련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영화편집

관련 항목편집

각주편집

  1. 《선원속보》 선조자손록 권1
    臨海君珒宣祖大王第一男 壬申八月十四 恭嬪金氏出
    임해군 진은 선조대왕의 맏아들로 임신(1572년) 8월 14일 공빈 김씨가 낳았다.
  2.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4월 14일(계묘)
  3. 선조 31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10월 19일(을사) 5번째기사, 경성판관 이홍업이 가져온 가토의 편지. 왕자들이 보낸 편지엔 7월 24일로 되어있다.
  4.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7월 1일(무오)
    함경남·북도가 적에게 함락되다
    왜장 청정(淸正)이 북계(北界)로 침입하니 회령(會寧)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임해군·순화군)와 여러 재신(宰臣)을 잡아 적을 맞아 항복하였다.

    이로써 함경남·북도가 모두 적에게 함락되었다.

    (중략)

  5.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8월 1일(무자)
  6. 광해 2권, 즉위년(1608 무신 / 명 만력(萬曆) 36년) 3월 2일(기축) 8번째기사
  7. 광해 4권, 즉위년(1608 무신 / 명 만력(萬曆) 36년) 5월 16일(신축) 2번째기사
  8. 광해 5권, 즉위년(1608 무신 / 명 만력(萬曆) 36년) 6월 1일(병진) 1번째기사, 정말로 광해군이 임해군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여론의 지지를 받고 사형시켜도 무리는 없었을 상황이였다.
  9. 광해 5권, 즉위년(1608 무신 / 명 만력(萬曆) 36년) 6월 20일(을해) 3번째기사
  10. 광해 15권, 1년(1609 기유 / 명 만력(萬曆) 37년) 4월 29일(경진) 5번째기사, 당시 임해군은 중풍을 앓고 있었다. 하지만 교동별장 이정표(李廷彪)가 관비를 통해 독살시키려 했으나, 관비는 거부하였고, 1609년 6월 4일(음력 5월 3일) 결국 직접 목을 졸라 죽였다고 되어 있다.
  11. 인조 1권, 1년(1623 계해 / 명 천계(天啓) 3년) 3월 15일(을사) 5번째기사, 교동의 현감이었던 이직(李稷)도 연류되어 있다.
  12. 광해군은 임해군의 사사를 계속 미루던 입장이었는데, '광해군의 지시에 의한 독살설'은 반정파가 광해군을 모멸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라고 본다.
  13. 인조 1권, 1년(1623 계해 / 명 천계(天啓) 3년) 3월 15일(을사) 5번째기사
  14. 선조 31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10월 19일(을사) 5번째기사, 경성판관 이홍업이 가져온 가토의 편지에서도 두 왕자와 관원들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왕손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실제로 왕손을 잡았다면, 편지의 목적상 왕손도 볼모로 잡았다고 언급할만한도 한데, 서신에는 두 왕자와 관원들의 기술만 존재한다. 또한 가토의 편지 외에도, 두 왕자를 비롯한 북병사(北兵使) 한극함(韓克諴), 남병사(南兵使) 이영(李瑛),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 김귀영(金貴榮), 장계 부원군(長溪府院君) 황정욱(黃廷彧), 전 호군(護軍) 황혁(黃赫)등이 포로 상태에서 보낸 편지에서도 왕손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15. 이후 인조실록에서 광해군의 죄악상에 관련한 부분에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으므로 사실무근한 날조라고 본다. 이런 주장은 가토의 공적을 부풀리는 야사에 근거한다고 본다.
  16. 선원록(璿源錄)이나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에서는 양자로 들어간 부분은 나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