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해군
임해군(臨海君, 1572년 9월 20일(음력 8월 14일) ~ 1609년 6월 2일(음력 4월 30일))은 조선의 왕자이며 선조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공빈 김씨이다.
임해군
臨海君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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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의 왕자 | |
이름 | |
휘 | 이진(李珒) |
시호 | 정민(貞愍) |
신상정보 | |
출생일 | 1572년 8월 14일(음력) |
사망일 | 1609년 4월 30일(음력) | (36세)
사망지 | 조선 경기도 교동군 |
부친 | 선조 |
모친 | 공빈 김씨 |
배우자 | 군부인 양천 허씨 |
자녀 | 1남 1녀 |
능묘 | 임해군묘(臨海君墓)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
개요
편집이름은 진(珒)이고 아명은 진국(鎭國)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임진왜란 때 함경도에서 이복 동생인 순화군과 함께 가토 기요마사에게 포로로 붙잡혔다가 풀려났다.[1]
선조의 여러 아들들 중에 이복 동생인 정원군, 순화군 등과 더불어 난폭한 행동을 일삼고 관료를 살해하는 등 전대미문의 광패한 행동을 일삼아 대신들이 처벌할 것을 강하게 청하였지만 선조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사병을 양성하여 반역을 꾀한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아[2]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사사되었다.
생애
편집초기
편집1572년(선조 5년) 8월 14일[주 1], 선조(宣祖)와 공빈 김씨(恭嬪 金氏)의 맏아들로 태어났다.[3] 여섯살 되던 무렵, 어머니인 공빈 김씨는 임해군과 광해군 형제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1585년(선조 18년), 허명(許銘)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4] 1591년(선조 24년) 광해군, 신성군, 정원군, 순화군 등과 함께 광국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책록되었다.
임진왜란
편집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임해군을 제치고 둘째 아들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는데, 임해군의 성격이 방탕하고 포악했기 때문이다.[5] 임해군은 왕명을 받고 이복 동생 순화군과 함께 근왕병을 모으기 위해 함경도로 떠났다.[6]
7월 23일,[7] 임해군과 순화군은 함경도 회령에서 지역 주민들을 비롯한 순왜(順倭,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협력한 조선인) 국경인(鞠景仁)과 국세필(鞠世弼) 등에게 포박되어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졌다.[1]
이후 임해군과 순화군은 몇 차례의 협상 끝에 풀려났다.[8] 임해군과 광해군 형제의 외조부인 김희철 또한 왜란 중에 전사하였다.[9]
왜란 이후
편집임해군은 왕자의 신분을 이용하여 교만하고 난폭하게 행동하였으며, 남의 전택과 노비를 빼앗았다.[10] 심지어 임해군이 부리는 시정잡배와 가노들 또한 주인인 임해군을 믿고 오만방자하게 행동하며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임해군은 무고한 사람을 폭행하거나 사소한 원한이 있는 자를 살해하였다.[11] 대신 유희서, 소충한 등이 임해군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큰어머니인 하원군의 아내 이씨는 모욕을 당했다.
이처럼 광패한 행동을 일삼아 대간과 삼사, 사헌부가 그 죄를 묻고 강하게 처벌할 것을 청하였으나 선조는 이를 묵살하였다. 이후에도 임해군과 정원군, 순화군은 끊임없는 탄핵을 받았으나 선조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최후
편집유배와 사사
편집광해군이 즉위하자, 임해군의 처벌과 추국을 요청하는 상소가 연이어 올라왔다. 임해군이 사병을 양성하고 있으니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에 따라 진도에 안치되었다가 교동으로 이배되었다.[12] 이후 의금부는 광해군의 지시에 따라 역모 혐의의 관련자들을 추국했으며, 양사는 임해군을 비롯한 기자헌, 이흥로(李弘老) 등을 처단해야 한다고 9번이나 재차 진언했다. 또한 홍문관도 차자를 올려 임해군의 사형을 진언했으나, 광해군은 이를 끝까지 윤허하지 않았다.[13] 그 후, 임해군은 교동으로 다시 유배 되었다.
사후
편집1609년(광해군 1년) 4월 30일[주 2], 이정표(李廷彪)는 임해군을 핍박하며 독을 마시게 했으나 따르지 않자 목졸라 죽였다.
임해군 이진의 졸기
- 임해군을 위소(圍所)에서 죽였다.
- 임해군이 위장(圍墻) 안에 있을 때 다만 관비(官婢) 한 사람만이 그 곁에 있으면서
- 구멍으로 음식을 넣어주었는데, 이때 이르러 수장(守將) 이정표(李廷彪)가 핍박하여
- 독을 마시게 했으나 따르지 않자 드디어 목을 졸라 죽였다.
사후 수원 광교산에 묻었다가 이후 양주 천마산 적성동으로 이장되었다. 현재 묘는 남양주시 진건읍에 위치한다. 인조반정 이후 인조의 명으로 복권되었다.[14]
자녀 억류설
편집임해군의 자녀들이 가토 기요마사에 의해 일본에 억류돼 승려가 되거나 일본 장수의 부인이 되었다는 소수의 의견이 있지만, 당시 억류된 왕족은 임해군과 순화군이며 사료에 왕손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고, 이를 확언할 사료와 자료가 전무하므로 자녀 억류설은 근거가 희박하다.
행적
편집임해군의 악행
편집- 임해군은 큰어머니를 꾸짖고 욕보이며 백성들의 전답과 재산을 갈취하고[15] 노비를 빼앗았다.[10] 수령을 욕보였을 뿐만 아니라 재상을 살해하였다. 시비가 붙으면 상대의 신분에 상관 없이 노복들을 시켜 구타하거나 모욕을 주는 행위를 일삼았으나, 선조는 임해군의 죄를 감싸주었다.[16]
- 임해군이 도적을 시켜 재신 유희서를 죽이자, 유희서의 고종 사촌이자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덕형이 유희서의 아들을 사면해줄 것과 유희서의 죽음에 대한 여러 일들과 임해군의 처벌을 왕에게 아뢰었으나, 선조는 이를 듣지 않았다. 마침내 이덕형은 사직하고 영의정에서 물러났다.[16]
- 이덕형이 차자를 올리고 직을 떠났다
- 임해군 진은 교만하고 음란한 짓을 멋대로 하여 불의(不義)한 짓을 많이 저질렀다.
- 유희서(柳熙緖)는 재신인데도 도적을 시켜 살해했고
- 하원군의 부인은 큰어머니인데도 모욕을 가했으니,
- 왕법(王法)이 시행되었다면 당연히 형벌을 받았을 것이다.
- 그러나 선묘(宣廟, 선조)의 현명함으로는
- 사사로운 사랑에 빠져 그의 악행을 알지 못하고 죄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 고신(拷訊)의 형벌이 도리어 도적을 잡은 중신(重臣)과 재신(宰臣)에게 미쳐서
- 임해군으로 하여금 횡포를 부려도 아무도 막을 사람이 없고
- 악을 행해도 징계받는 일이 없게 만들었으니,
- 이는 실로 성조(聖朝, 선조)의 실덕(失德)이다.
- 덕형은 자신이 수상(首相)이기 때문에 이 일에 대해 아뢴 것은
- 대신(大臣)으로서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체통을 세운 것이라 하겠다.
- 임해군은 궁노를 풀어 남의 산택을 멋대로 차지하고, 재물이 많은 시장 상인에게 누명을 씌워 은포를 받아내었으며, 남의 지아비를 죽이고 그 아내를 억지로 궁노와 짝지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양주 백련사(白蓮寺)에서 시주받은 재물을 빼앗아갔으며, 자신의 궁가에 산채(山菜) 동물을 바치게 하였다.[17]
- 왕자 임해군 이진(李珒)은 궁노(宮奴)를 풀어 보내어 산택을 멋대로 차지하였고,
- 재화가 많은 시장 사람은 죄가 있다고 칭탁하여 얽어매어 매우 괴롭히다가
- 시장 사람이 은포(銀布)를 많이 바친 연후에야 놓아주었다.
- 또 거위와 오리를 수천 마리나 기르면서 아침이면 반드시 미방(米坊)으로 내몰았는데,
- 먼지를 일으키고 남의 쌀을 쪼아먹어도 감히 소리질러 쫓지 못하였으며
-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그 대가를 톡톡히 받아내었다.
- 무뢰배들이 임해군과 순화군 등 왕자를 사칭하고 다니며 여염집에 피해를 입히자, 임해군은 선조에게 평소 왕자들의 행실에 대해 대죄하였는데, 선조는 괜찮다고 하며 사칭하는 무리들만 잡아들이게 하였다.[18]
- 선(善)하지 않은 사람에게 악(惡)이 들러붙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 임해군의 패망이 극도에 달하였으니 무뢰배들이 사칭하는 것은 참으로 당연하다.
- 이때 임해군이 대죄하는 양심(良心)을 보이면
- (임금은) 임해군이 평상시에 저지른 패도(敗度)함을 책망함으로써
- 임해군 스스로 반성하여 두려워하는 바가 있게 해야 하는데,
- 이렇게 하지는 않고 단지 사칭하는 무리들만을 징계하여 다스리려고 하였으니,
- 왕자가 교만 · 횡포하고 백성들이 원망하여 배반하는 것은 이상하게 여길 것도 없다.
— 《선조실록》 160권,
선조 36년(1603년 명 만력(萬曆) 31년) 3월 6일 (임술)
- 임해군의 난폭함으로 조정과 민간에서 고통스러워하자 마침내 선조는 임해군이 빼앗은 노비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게 하였다.
- 선조의 여섯째 아들인 순화군은 광망하여 재물 갈취와 폭행, 수령관 모욕, 살인 등 임해군과 마찬가지로 여러 문제를 일으켜 마침내 선조에 의해 작위를 박탈당했는데, 1607년(선조 40년) 사망하였다. 실록의 순화군의 졸기에는 이러한 순화군의 행동이 임해군과 정원군의 행패보다는 덜했다고 기록되어있다.[19]
가족 관계
편집관련 작품
편집드라마
편집- 《여인열전 - 서궁마마》 (MBC, 1982년, 배우:김무생)
- 《임진왜란》 (MBC, 1985년~1986년, 배우:정성모)
- 《회천문》 (MBC, 1986년, 배우:임정하)
- 《서궁》 (KBS2, 1995년, 배우:임혁주)
- 《천둥소리》 (KBS, 2000년~2001년, 배우:이원발)
- 《왕의 여자》 (SBS, 2003년~2004년, 배우:김유석)
- 《불의 여신 정이》 (MBC, 2013년, 배우:이광수, 이인성)
- 《왕의 얼굴》 (KBS2, 2014년~2015년, 배우:박주형)
- 《징비록》 (KBS1, 2015년, 배우:윤홍빈)
- 《화정》 (MBC, 2015년, 배우:최종환)
영화
편집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가 나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7월 1일 (무오)
함경도가 적에게 함락되다 - ↑ 《광해군일기》[중초본] 1권, 광해 즉위년(1608년 명 만력(萬曆) 36년) 2월 14일 (신미)
임해군이 사병을 양성하니 절도로 유배해야 한다는 부제학 송응순 등의 차자
홍문관 부제학 송응순, 전한 최유원, 응교 이지완, 부교리 기협, 부수찬 성시헌, 정자 목대흠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임해군 이진이 은밀히 이심을 품고 군병을 양성하고 무기를 저장한 의심스런 정적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은 지 오래입니다.
이제 와서도 여막에서 지극히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철퇴와 환도를 빈 가마니에 싸서 다수 반입하였으니, 가까운 집안에서 변이 발생할 조짐이 조석에 임박하여 있습니다.
대의에 의거 결단을 내려 절도에 유찬시킴으로써 종사의 안전을 도모하고 우애를 온전히 보존하는 방도로 삼으소서."
하니, 비망기로 삼사에 답하기를,
"나의 형이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내가 계사(啓辭)를 보고 안타까워 눈물이 흐르는 것을 견딜 수가 없다.
불행하게도 이런 공의(公議)가 유발되었으니, 대신에게 문의하여 조처하라."
하였다.
- ↑ 《선원속보》 선조자손록 권1
臨海君珒宣祖大王第一男 壬申八月十四 恭嬪金氏出
임해군 진은 선조대왕의 맏아들로 임신년(1572년) 8월 14일 공빈 김씨가 낳았다. - ↑ 《선조실록》 19권, 선조 18년(1585년 명 만력(萬曆) 13년) 4월 17일 (무오)
임해군 이진이 허명의 딸을 맞아들이다
왕자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이 【김빈(金嬪, 공빈 김씨)의 소생이다. 김빈은 김희철(金希哲)의 딸로 총애를 받았다. 숙의(淑儀)로 있다가 빈(嬪)에 봉해졌는데 임해군은 왕자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다.】 허명(許銘)의 【처음 입신(立身)할 때부터 칭찬할 만한 지조가 없더니, 혼인하던 날 이리저리 영구(營求)하는 것이 매우 번거로왔다. 】 딸을 맞아들였다. - ↑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4월 14일 (계묘)
임해군 이진은 폐단을 심하게 일으켰으나 광해군은 중외 사람들이 많이 따르다
상(선조)의 맏아들인 임해군 이진(李珒)은 성질이 거칠고 게을러 학문을 힘쓰지 않고 종들이 제마음대로 하도록 놔두어 폐단을 더욱 심하게 일으켰다.그러나 광해군은 행동을 조심하고 학문을 부지런히 하여 조정과 민간의 백성들의 마음이 복속하였으므로 상이 가려서 세웠다.
- ↑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4월 14일 (계묘)
- ↑ 《선조실록》 31권, 선조 25년(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10월 19일 (을사)
- ↑ 《선조실록》 41권, 선조 26년(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8월 23일 (갑진)
- ↑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8월 1일 (무자)
- ↑ 가 나 《선조실록》 131권, 선조 33년(1600년 명 만력(萬曆) 28년) 11월 25일 (을축)
순화군이 일찍이 임해군에게‘나는 비록 경망하여 사람을 구타하지만 형이 남의 전택(田宅)이나 장획(臧獲, 노비)을 빼앗는 것보다는 낫다.’ 하였는데,
사람들도 이 말만은 그렇다고 여겼다.
대개 임해는 백성의 재물을 무리하게 마구 빼앗았으니 그 악독함이 더욱 가혹하였다
- ↑ 《선조실록》 152권, 선조 35년(1602년 명 만력(萬曆) 30년) 7월 4일 (계해)
간원에서 임해군의 살인죄, 가례 도감의 준비 미숙 등을 조사토록 하다
간원이 아뢰기를,"임해군 이진(李珒)이 전 주부(主簿) 소충한(蘇忠漢)을 지척의 궁궐 담장 밖에서 몽둥이로 때려 죽였습니다.
대낮에 아무 거리낌없이 살인을 했으니 국가의 법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유사(有司)로 하여금 법에 따라 조사해서 율에 비추어 시행하게 하소서."
(중략) - ↑ 《광해군일기》[중초본] 2권, 광해 즉위년(1608년 명 만력(萬曆) 36년) 3월 2일 (기축)
임해군을 교동현으로 이배하여 안치하다 - ↑ 《광해군일기》[중초본] 5권, 광해 즉위년(1608년 명 만력(萬曆) 36년) 6월 13일 (무진)
양사가 임해군 이진의 처벌을 주장했으나 다시 논하지 말라고 하다 - ↑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1623년 명 천계(天啓) 3년) 3월 15일 (을사)
- ↑ 《선조수정실록》 23권, 선조 22년(1589년 명 만력(萬曆) 17년) 4월 1일 (정축)
이때에 여러 왕자들의 제택 공사가 아울러 시작되고 각 궁가에서 전장(田庄)을 널리 점유하여 교야(郊野)의 안쪽까지 침탈당하였다.임해군은 연장자로서 가장 횡포하였으므로 조야가 근심스럽게 여겼다.
- ↑ 가 나 《선조수정실록》 38권, 선조 37년(1604년 명 만력(萬曆) 32년) 3월 1일 (신해)
영의정 이덕형이 사면을 청하니 윤허하다 - ↑ 《선조실록》 160권, 선조 36년(1603년 명 만력(萬曆) 31년) 3월 9일 (을축)
- ↑ 《선조실록》 160권, 선조 36년(1603년 명 만력(萬曆) 31년) 3월 6일 (임술)
- ↑ 《선조실록》 209권, 선조 40년(1607년 명 만력(萬曆) 35년) 3월 18일 (신사)
- ↑ 《승정원일기》 89책 (탈초본 5책) 인조 22년(1644년 청 순치(順治) 1년) 10월 17일 (신미)
- ↑ 《인조실록》 27권, 인조 10년(1632년 명 숭정(崇禎) 5년) 10월 16일 (경진)
- ↑ 《인조실록》 27권, 인조 10년(1632년 명 숭정(崇禎) 5년) 10월 16일 (경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