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쿠알 세르베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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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무 = [[스페인 해군]]
|복무 기간 =
|최종 계급 = 해군 대장중장
|근무 =
|지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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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쿠알 세르베라 이 토페테'''(Pascual Cervera y Topete, [[1839년]] ~ [[1909년]])는 [[미서전쟁]] 당시 [[스페인]] [[스페인 해군|함대]]를 지휘했던 사람이다. [[산티아고 데 쿠바산티아고데쿠바 전투]]에서 [[미국 해군|미 해군]]에 패배했다. 해군사관학교 출신으로 [[모로코]] 근해와 [[술루 제도]], [[필리핀]] 등지에서 작전에 참가했다. 그 후 [[제1차 쿠바 전쟁]]([[1868년]]~[[1878년]]) 초기에 서인도 해군기지에 있다가 [[1873년]] 스페인으로 돌아와 카를로스 지지파에 맞서 [[바스크]] 해안을 방어했다. 몇 년 동안 계속적으로 승진했고, [[1892년]]에는 [[프락세데스 마테오 사가스타]] 내각에 의하여 해군 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해군 개혁과 추가 경비에 대한 지지를 받지 못하여 곧 사임했다.
 
[[1898년]] [[4월]] [[미국-스페인 전쟁]]이 일어나자 [[카보베르데]] 제도에 기지를 둔 4척의 순양함과 수 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된 소함대의 지휘를 맡았다. 이 비운의 함대는 사령관이 이미 몇 차례에 걸쳐 해군 장관과 총리 사가스타에게 석탄과 탄약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경고 전문을 보냈으나 응답을 받지 못한 채 무모하게 대양으로 출항했다. 그는 정부의 지시를 따라 육상 봉쇄된 [[산티아고데쿠바]] 항구로 가서 약간의 [[대포]]와 해군 여단을 상륙시켜 수비에 협조했다. 그는 계속해서 열띤 진정을 올렸으나, [[마드리드]]에서는 정치적 이유를 내세워 계속 항진하라는 명령만 내렸을 뿐이다. 그의 소함대는 3배나 우세한 미 해군에게 전멸당하고 말았다. 그는 3명의 함장과 1,800명의 선원 및 수병과 함께 [[뉴햄프셔]]의 [[포츠머스]]로 잡혀갔다. 전쟁이 끝난 뒤 그와 함장들은 스페인 육해군의 최고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모두 명예롭게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1901년]]에 해군 중장이 되고, 이듬해에는 해군 참모 총장이 되었으며, [[1903년]]에는 종신 상원 의원이 되었다.
 
[[분류:1839년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