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왕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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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4년]], 연잉군(延仍君)과 혼인하여 달성군부인(達城郡夫人)으로 책봉되었고 [[1721년]],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세제빈(世弟嬪)이 되었으며 [[1724년]], [[조선 경종|경종]]이 승하하고 왕세제인 영조가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어질고 너그러운 성품을 가졌다고 전해지며 생전에 [[영빈 이씨]]의 아들인 [[조선 장조|사도세자]](思悼世子)를 친자식처럼 대하였다. 그러나 남편인 영조가 장수한 탓에 60대에 이르러서도 [[대비 (사람)|대비]]가 되지 못하다가 [[1757년]], [[창덕궁]] 관리각(觀理閣)에서 66살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의 [[서오릉]] 내에 위치한 '''[[홍릉 (정성왕후)|홍릉]]'''이다.
 
[[1757년]], 66살의 나이로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영조는 정성왕후의 능을 아버지인 [[조선 숙종|숙종]]의 명릉(明陵) 근처에 만들고 훗날 자신이 정성왕후의 옆에 묻히기 위해 옆자리를 비워놓았으나 [[1776년]], 영조가 승하한 뒤 손자인 [[조선 정조|정조]]는 당시 [[왕대비]]였던 영조의 계비(繼妃)인 [[정순왕후 (영조)|정순왕후]]를 의식하여 현재의 [[동구릉]] 위치에 영조와 [[정순왕후 (영조)|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을 조성하였고 결국 정성왕후는 옆자리가 비워진채 홍릉에 홀로 남겨지게 되었으며 조선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옆자리가 비워진 능으로 남아있다되었다.
 
[[1740년]], 혜경(惠敬)이라는 존호가 올려진 뒤 생전에 장신(莊愼), 강선(康宣) 등의 존호가 올려졌고 승하 이후인 [[1772년]]에는 공익(恭翼)의 존호가 추상되었으며 인휘(仁徽), 소헌(昭獻)이 다시금 추상되어 혜경장신강선공익인휘소헌(惠敬莊愼康宣恭翼仁徽昭獻)의 존호를 가지게 되었고 [[1778년]], 단목장화(端穆章和)의 존호가 추가되었다. [[1907년]] [[대한제국 순종|순종]] 임금에 의해 '''정성영황후'''(貞聖英皇后)로 추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