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 (귀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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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苩加, ? ~ [[501년]])는 [[백제]] [[동성왕]](東城王) 때의 대신으로, 대성팔족(大姓八族)중의 하나인 백(苩)씨 출신 귀족이다.<ref>《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무령왕조</ref>
{{출처 필요}}
'''백가'''(苩加)는 6세기 초기 [[마한]]의 수장이다.
 
==개요생애==
 
[[486년]](동성왕 8) 2월, 위사좌평(衛士佐平)에 임명되어 숙위병(宿衛兵)을 관장하였다.
5세기 후반, 백제는 동성왕 시대에 마한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여 [[마한]]과 교섭하고 있었다. 백제는 마한 호족에게 벼슬을 부여하고 지배하려고 하였다. 동성왕은 힘이 세고 활쏘기를 잘했지만, 방탕하고 사치를 좋아해 민심이 흉하게 만들었으며, 동성왕의 왕권 강화책에 마한 호족들은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501년]](동성왕 23) 8월, 신축한 가림성(加林城)<ref>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성흥산성</ref>을 지키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부임하기를 원하지 않아 신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501년에 백가는 동성왕이 사냥을 나갔을 때 백가가 군사를 동원하여 동성왕은 화살을 맞혀 살해하였다. 무령왕은 군대를 동원하여 백가의 목이 잘라 시체와 함께 백마강(白馬江)에 던져졌다. 백가(苩加)의 반란은 [[마한]]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한 백제와 마한과의 세력 다툼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성왕]](東城王)이 허락하지 않고 강제로 가림성에 부임시키자, 이를 계기로 동성왕에게 앙심을 품어,
같은 해 11월 사냥을 하고 나서 눈으로 길이 막혀 마포촌(馬浦村)<ref>충남 서천군 한산면의 옛 이름이 마산(馬山) 또는 마읍(馬邑)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지금의 서천군 한산면으로 추정된다.</ref>
 
에 묵은 동성왕을 자객을 시켜 칼로 찌르게 했고, 동성왕은 결국 12월에 사망했다.
501년 이후, 마한 세력은 현재의 전라남도, 창원 등으로 내려 갔다. 전라남도 나주 지역의 마한 세력 무덤에서 금동 신발, 금관 왕관, 금관모, 신라 미추왕 무덤에서 출토된 서수형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전남 마한의 유물은 신라 미추왕 주변에서 출토된 유물과 유사하였는데, 특히 금관의 경우 경주에서 출토된 금관과 형태가 매우 유사하였다. 금관은 창령 가야 지역에서도 일부 출토되었다. 나주 지역에서 출토된 유골을 분석한 결과 신라, 가야인의 유골도 발견되었다.
 
그 후, 부임지인 가림성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백가(苩加)는 백(白)자와는 한자가 달라서 백(白)씨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한반도의 토착인들은 삼한 시대에는 대체로 성이 없었고, 고려 시대 왕건이 성씨 분성 정책에 따라서 성을 가졌다.
새로 즉위한 [[무령왕]](武寧王)이 군대를 거느리고 우두성(牛頭城)<ref>지금의 충청남도 청양</ref>에 이르러 한솔(扞率) [[해명 (백제)|해명]](解明)에게 토벌하게 하자,
저항하지 않고 성을 나와 항복하였지만 죽임을 당했고, 그의 시체는 백강(白江)에 던져졌다.
 
동성왕의 왕권 강화책으로 인해 새로이 부상한 백(苩)씨 가문이 왕권과 친밀한 관계에 있으면서도 동성왕을 살해한 원인은,
동성왕의 지배구조에 대한 재편성 계획이 중앙 귀족들의 이해 관계와 맞지 않았던 데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주석==
 
<references/>
 
[[분류:백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