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비우스 요세푸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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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경 첫 아내와 이혼한 요세푸스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 여성과 혼인하여 플라비우스 히르카누스(Flavius Hyrcanus)라는 아들과 알려진 바가 전혀 없는 다른 아이를 포함하여 아이 둘을 낳았다. [[75년]]경 다시 이혼하여 세 번째 혼인으로 플라비우스 유스투스(Flavius Justus)와 시모니데스 아그리파(Simonides Agrippa)라는 아들 둘을 낳았다. 유대 전쟁에 참전했으며 예루살렘의 함락까지 모두 지켜본 그가 자신의 경험과 여러 자료를 토대로 저술한 《유대전쟁사》는 높은 평가를 얻었다. [[95년|기원후 95년]]경, [[천지창조]] 때부터 시작해 유대인들의 역사를 서술한 《유대 고대사》도 완성시켰다.('플라비우스 증언'이라 불리는 [[예수]]에 관한 기술로도 유명하다)
 
요세푸스의 생애는 모호한 점이 많다. 플라비우스 왕조 3대의 황제를 섬기며 어떤 제약도 없는 생애를 보낸 것처럼 보이지만, 그를 비난하는 이들은 그가 전쟁 당시 갈릴리에서 동료들과 같이 자살하지 않고 로마 군에 투항한 점, 포로가 된 후에는 로마 군과 협조한 점에 대해 충분히 설명을 하지 못했다고 주장해왔다. 실제로 그러한 요세푸스 본인에 대한 동포 유대인이나 로마인들로부터의 비난, 그리고 중상모략은 그가 특별한 정치활동보다는 저술에만 몰두하게 한 요인이기도 했다는 지적이 있지만, 요세푸스를 배반자 및 밀고자로 보는 입장에서 그의 저술은 로마의 선전물 내지는 자기 변명 정도로 여겨졌고 역사가로서의 그의 신뢰도는 평가절하되어 왔다. 그러나 로마 시대, 특히 갈등이 극에 달했던 시대에 유대인들과 유대 문화에 대한 중요한 변명자였음은 틀림없다. 그는 스스로 애국적이고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으로 보았다. 교육받은 이방인들에게 유대교를 옹호하고 추천하기까지 했으며 그리스-로마 사상과의 호환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유대 문화가 역사가 오래되었으며 유대인들을 문명화되고 신앙심이 두터우며 철학적인 민족으로 그렸다.
 
[[100년|기원후 100년]]경에 그는 로마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