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코의 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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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년]] 4월 갑작스럽게 병을 얻은 헤이제이 천황은 자신의 병을 앞서 아버지에게 처형된 숙부 사와라(早良) 친왕이나 친동생 이요 친왕의 망령 때문이라 여겼고, 재난을 피하기 위해 양위를 결심했는데, 이때 천황의 양위를 극구 반대한 것이 당시 헤이제이 천황의 총애를 받으며 권세를 휘두르고 있던 상시(尙侍) 후지와라노 구스코와 그 오빠 후지와라노 나카나리였다. 하지만 천황은 양위에 대한 강한 의사를 보이며 동년 4월 13일에 양위, 진노 친왕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사가 천황). 황태자로는 헤이제이 천황의 아들인 다카오카(高岳) 친왕이 책봉되었다.
 
[[810년]], 퇴위한 헤이제이 상황은 구도 [[헤이조쿄|헤이조쿄(平城京)]]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헤이제이 상황이 천황으로 있던 시절에 설치했던 관찰사 제도를 사가 천황이 개정하려고 한 것에 대해 상황은 불쾌하게 여겼고<ref>일본에서는 헤이안 시대 초기인 797년경, 지방 행정을 보다 철저하게 처리하고자 했던 간무 천황에 의해 지방관의 행정실적을 감사하는 감해유사(勘解由使)가 설치되었다. 감해유사는 지방관의 행정을 엄정하 감사하며 지방 행정 향상에 일정한 효과를 올리고 있었다. 헤이제이 상황은 간무 천황의 뒤를 이어 즉위한 뒤 정치 쇄신을 내걸고 [[806년]] 6월에 감해유사를 폐지하고 [[807년]]까지 일곱 도와 기내에 관찰사를 두어 산기가 이를 겸임하게 했는데, [[810년]] 6월에 사가 천황은 관찰사를 없애고 산기를 부활하는 조를 발령하면서 4년만에 관찰사 제도는 폐지되었다.</ref>, 삽시간에 상황의 조정(헤이조쿄)과 천황의 조정(헤이안쿄)으로 파벌이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다. 이 대립을 뒤에서 조장한 것도 헤이제이 상황의 복위를 획책하고 있던 구스코나 나카나리였다고 한다. 게다가 구스코가 당시 맡고 있었던 상시라는 직책은 천황이 [[태정관|태정관(太政官)]]에 대해 내리는 명령서인 내시선(內侍宣)의 발급을 관장하는 직책이었으며, 당시 정계의 관념에서는 태상천황을 천황과 마찬가지로 국정에 관여할 수 있는 위치로 여겼기에, 경우에 따라서는 상황이 구스코의 직권으로 내시선을 내어 태정관을 움직이는 사태도 일어날 수 있었다.
 
또한 사가 천황은 3월에 쿠란도도코로(蔵人所)를 설치하고, 6월에는 조를 내려 관찰사를 폐지하고 [[산기|산기(參議)]]를 부활시켰다. 이는 결정적으로 헤이제이 상황을 자극하게 된다.
 
== 경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