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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병'''({{lang|漢|私兵}})은 권력이 강한 개인이 사적으로 훈련시키고 급료를 주어 소유한 군인 혹은 군대이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금지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신라 말에 처음 생겨나 [[고려]]를 건국하는 하나의 배경이 되었을 뿐 아니라,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후반에 걸치는 1세기 동안이 무신정권을 유지하는 원동력이었다. [[조선]] 초기까지 사병이 유지되었으나 [[조선 태종|태종(太宗)]]에 의해 해체되었다.
 
== 개요 ==
 
사병이라는 단어 자체는 일단 고려 말 조선 초의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며, 그 이전의 기록에서는 '무리' 내지 '패거리'라는 뜻을 지닌 「중(衆)」이라는 한자를 사용해 표현하였다. 이 단어에는 병중(兵衆) 또는 사병의 의미가 담겨 있으며<ref>이기백, 「신라사병고」(1955, 이기백한국사학논집6 「신라정치사회사연구」1974, p.258).</ref> 군사적인 문제를 다룬 기록에서 많이 쓰이고 있다.<ref>고대 중국 남북조 시대에도 사병적 성격의 부곡을 일반적으로 중ㆍ사중(士衆)ㆍ병(兵) 등으로 불렀던 것이 지적되고 있다. 미야카와 히시유키(宮川尙志), 「남북조의 군주ㆍ대주ㆍ수주 등에 대하여(南北朝の軍主ㆍ隊主ㆍ戍主等について)」, 동양사연구(東洋史硏究) 13의 6, 1955, P.1.</ref> 고대, 특히 신라의 사병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이기백의 「신라사병고(新羅私兵考)」(1955. 8)에 의해 신라의 사병의 존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처음으로 이루어졌으며, 「신라사병고」 이후의 사병에 대한 연구는 주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존재했던 사병의 존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유재이의 「고려말 조선초 사병연구」(1996), 전철기의 「여말선초의 사병」(1999) 등이 있다.
 
== 역사 ==
 
중국의 역사책인 《[[신당서|신당서(新唐書)]]》신라전(新羅傳)에는 "재상가(宰相家)에는 녹이 끊이지 않는데, 노동(奴童)이 3천 인이고 갑병(甲兵)과 우마(牛馬)와 돼지도 그만큼 된다."<ref>《신당서》신라전, "宰相家不絕祿, 奴僮三千人, 甲兵牛馬豬稱之."</ref>는 기록이 있는데, 일제 시대에 사회경제사학자 [[백남운|백남운(白南雲)]]이 그의 저서 「조선사회경제사(朝鮮社會經濟史)」(1933)에서 이 기록을 처음으로 찾아내어 언급하였고, [[사회주의]] 사학자 이청원(李淸源)의 「조선역사독본(朝鮮歷史讀本)」(1937년)과 일본 학자 후지타 요사쿠(藤田亮策)의 「신라구주오경고(新羅九州五京攷)」(1953) 등에서 신라에 사병이 있었음을 인정하였다. 여기에서는 신라 중앙귀족의 사병에 대하여, 《삼국사기》김양전(金陽傳)에 실려있는, 흥덕왕 사후에 왕위를 놓고 김균정과 [[희강왕|김제륭(金悌隆)]]이 벌인, 그리고 김균정의 아들 [[신무왕|김우징(金祐徵)]]과 [[민애왕]]의 전투에 대한 기록이다. 이때 김균정의 편에 서있던 김양이 '''족병(族兵)'''을 거느리고 먼저 궁으로 들어가서 지키고 있었고<ref>《삼국사기》44, 김양전</ref>, 균정이 패하여 죽은 뒤 숨어 지내다가 그의 아들 김우징이 [[청해진|청해진(淸海鎭)]]에서 [[장보고|장보고(張保高)]]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김양 자신이 '''모사(慕士)와 병졸을 모아''' 청해진에 가서 김우징을 뵈었다<ref>위와 같음.</ref>는 기록을 찾아냈고, 여기서 말한 '족병'이나 김양 자신이 불러모았다는 '모사와 병졸'이 바로 김양 자신의 사병이었음을 주장하였다.<ref>또한 처음 김우징과 김제륭의 전투에서 김양의 넓적다리를 화살로 쏘아 맞춘 배훤백(裵萱伯)은 《삼국사기》김양전에 김제륭의 하(下, 하사下士)로 기재되어 있는 점을 들어 배훤백은 김제륭의 족병이었다고 보았다. 이기백, 위의 논문(1955, 위의 책, p.258)</ref>
 
중앙 조정의 귀족뿐 아니라 지방의 세력가들도 그들의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삼국유사》혜공왕조에 "왕도 및 5도 주군의 96각간이 서로 싸워서 크게 어지러웠다"는 기록은 왕도 즉 서라벌뿐 아니라 지방(5도주군)의 '각간'이라 불린 세력가들이 그들끼리 서로 항쟁할 정도의 무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해석되었다.<ref>이기백, 위의 논문(1955, 위의 책, p.263)</ref> 9세기 말, 진성여왕 이후 신라 조정이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초적이 각지에서 발호하던 시점에서 지방의 군태수나 현령 등은 '장군' 또는 '성주'라 칭하면서 독립된 사병을 지닌 자들로서 그 세력을 떨치게 되었으며, 『봉림사진경대사비』에 나오는 진례성주처럼 신라 조정으로부터 '지진례성제군사(知進禮城諸軍事)'와 같은 '지제군사'의 칭호를 받거나 혹은 궁예ㆍ진훤 등 강력한 반신라 봉기세력에 가담하기도 하면서 그들이 다스리는 범위 내에서나마 중앙과 맞먹는 독립된 권력을 누리며 따로 행정조직을 갖추기도 했음을 《고려사》선거지나 『용두사철당기(龍頭寺鐵幢記)』에서 볼 수 있다. 이기백은 「신라사병고」에서 조선 후기의 《[[연조귀감]]》에 기재된 《흥양이씨보(興陽李氏譜)》의 기록 "신라 말에 귀족의 후예가 다투어 호무(豪武)를 사용하여 주와 현을 제패하였는데, 고려 통합 초에 귀복하지 않는 자가 있자 이들을 진압하지 못할까 근심하여 강제로 소재지의 호장으로 삼았다"는 기록을 찾아내어, 고려 초에 호장으로 개편된 신라 말의 지방 호족들이 사병을 거느리고 지방에서 패권을 쥐었던 사실을 언급하였다.<ref>《연조귀감》이나 《흥양이씨보》보다 앞선 기록인 김종직의 《이존록》에는 "(지방에 흩어진 김씨 종파와 지파의 후손들이) 서로 다투어 호무(豪武)를 사용하여 주군(州郡)의 우두머리가 되어, 그 토지와 인민(人民)을 차지하고서 나라에 공부(貢賦)를 바치고..."라는 기록이 있다.</ref>
 
== 발생 ==
 
통일을 계기로 확장된 신라의 영토ㆍ인구에 대한 지배 과정에서 대토지 소유자로 발전해간 신라의 중앙귀족들은 차츰 내부분열과 대립을 통해 같은 골족 안에서도 항쟁이 격해졌고 이러한 분화된 '종족(宗族)'이라는 사회적인 세력 단위간의 대립이란 이미 신라 건국 초기부터 존재했던 것이지만 통일 뒤에는 더욱 노골화되었고, 신라 하대에 이르면 또다시 이 종족을 형성하는 분자로서의 '가족(대가족)'이 또다시 유력한 사회적 존재로서 나타나 왕위계승을 에워싼 정권다툼의 씨앗이 되었다. 이러한 상호간의 항쟁 속에서 도태되고 중앙에서 밀려나 분립하게 된 귀족들이 그들의 세력 기반으로서 소유하고 있던 토지와 인력을 지배할 무장력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 사병이 발생한 하나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 참고자료 ==
 
* 「신라정치사회사연구」(이기백, 『역사학보(歷史學報)』9, 1957 ; 일조각, 1974)
 
==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