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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경장 이후 급격한 근대화 및 총기류의 발전으로 궁술은 점차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지기에 이르렀다. 궁술의 쇠퇴에 주목한 것은 조선의 26대 국왕이었던 고종으로, 고종은 전래의 궁술이 쇠퇴하는 것에 우려를 표하면서 광무 2년([[1898년]])에 지금의 [[경희궁]] 회상전 북쪽에 [[황학정]]이라는 활터를 만들어 활쏘기를 할 수 있도록 개방하는 등 궁술을 유지ㆍ보전시키는데 힘썼다. [[1909년]] 7월 15일에 동대문구 창신동에서 이상필(李相弼)ㆍ이용문(李容紋) 등이 중심이 된 사궁회(射弓會)가 발족되었으며, [[1916년]] 7월에는 경성궁술회(일명 관덕회)라는 활 쏘는 사람들의 모임이 만들어졌다. 이후 [[1919년]]의 3ㆍ1운동을 거쳐 [[1922년]]에 서울 경기 지역을 비롯한 전국의 활터의 사두(射頭)들이 모여서 조선궁술연구회(朝鮮弓術硏究會)를 발족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한국 궁술의 직접적인 선조격이다. [[1929년]]에는 드디어 기존에 쓰이던 활쏘기 용어와 습사용 각궁의 제작 방법, 활쏘기를 배우는 순서, 활터에서의 예절 등을 성문화한 「조선의 궁술」이라는 책이 발간되었고, [[1928년]] 7월 13일에 황학정에서 처음으로 전조선궁술대회가 열렸다.
 
이후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조선민족말살정책]]의 여파로 [[1938년]]에 남산에 있던 활터인 석호정이 폐쇄되는 등의 어려움을 겪었으나, 조선궁술연구회는 [[1926년]] 5월 조선궁도회로 개칭하였으며, 해방 뒤인 [[1946년]] 2월에 다시 조선궁도협회로 개칭하여 [[1954년]] 3월 대한체육회에 가맹하였다. [[1963년]] 7월부터는 국제궁도연맹(FITA)에 가입하였고 [[1983년]] 3월에 양궁부를 [[대한양궁협회]]로 분리하여 [[1999년]] 6월 사단법인 인가를 받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 다른 나라의 활과의 비교 ==
우선 활의 종류부터, 한국의 활은 중국이나 터키, 몽골과 같은 합성궁이자 단궁으로 분류된다. 하나의 재료만 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재료들을 복합적으로 섞어서 쓰는 활의 경우 활의 탄성한계를 더욱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한국의 활 역시 다른 나라의 활과 마찬가지로 활시위를 잡아당길 때 얼굴까지 오는 데에 그친다. 화살을 활에 매기는 경우 화살을 활의 오른쪽에 맞추고 오른손 엄지뿌리에 활시위를 걸어 당기는 것은 몽골식이다. 이는 검지와 중지를 가지고 활시위를 당기는 지중해식과 구별되는 점이다.
 
몽골식의 경우 대부분 화살을 활의 오른쪽에 두는데 이것은 일설에서는 빠르게 달리는 말 위에서 역풍을 받아도 화살이 날아갈 수 있도록 할 방법을 궁리한 끝에 나온 것이라고도 한다.<ref>다만, 일본의 마상무예에서는 진행방향의 오른쪽으로 화살을 쏘는 경우도 있다.</ref>
 
==궁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