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에로니무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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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정보
|이름=히에로니무스
|출생일=c. 340348-347420
|사망일=420
|축일=[[9월 30일]] ([[로마 가톨릭 교회|서방 교회]])<br />[[6월 15일]] ([[동방 정교회]])
|교파=[[로마 가톨릭 교회]]<br />([[정통개혁파교회|서방 교회]])<([[로마 가톨릭 교회|서방 교회]])<[[동방 정교회]]<br />[[성공회]]<br />[[루터교]]<br />[[오리엔탈 정교회]]
|그림=St.-Jerome-In-His-Study.jpg
|그림크기=25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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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성직자, 고해 신부, 교회의 박사
|상징=사자, 추기경 차림새, 십자가, 해골, 나팔, 올빼미, 책과 필기도구
|수호=고고학자, 기록 보관인, 성서성경 학자, 도서관 사서, 도서관, 학생, 번역가
|매장지=[[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이탈리아]], [[로마]]
}}
 
'''에우세비우스 소프로니우스 히에로니무스'''({{llang|la|Eusebius Sophronius Hieronymus}}, [[347년348년]] - [[420년]] [[9월 30일]])또는 '''예로니모'''({{lang|la|Jeronimo}}), '''제롬'''({{llang|en|Jerome}})은 성직자이며초대교회 성직자이다 ,<ref>[http://www.newadvent.org/cathen/08341a.htm 성 제롬, 가톨릭 백과사전]</ref>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이후의 [[초대교회]] 신학자이자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사람으로서 [[성서성경]]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이름은 라틴어로 ‘신성한 사람’을 뜻한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성인 (종교)|성인]]이며으로 추대하고 있다. 교회박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축일은 [[9월 30일]]. 흔히 상체를 벗은 은수자로서 펜을 들고 저술에 몰두하거나 돌로 가슴을 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상징물은 십자가·해골·모래시계·책·두루마리이며, 학자·학생·고고학자·서적상·순례자·사서·번역가·수덕생활을 하는 사람의 수호 성인이다.
 
== 행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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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병에 걸려 병상에 눕게 되자 그는 이것이 신이 내린 징벌이라 생각하고 비로소 자신의 죄를 반성하게 되었는데 그 후 갑자기 병이 치유되었으며 그로인해 [[기독교]] 신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주일마다 성지 순례, 특히 카타콤베를 방문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360년에 [[교황 리베리오]]로부터 [[세례성사]]를 받고 로마를 떠나 [[게르마니아]] 지역의 트레비스 시로 가 연구 활동을 계속 하다가 곧 세계 곳곳을 여행한 뒤, 370년경 고향인 아퀼레이아로 돌아와 수사가 되었다. 이때 그는 [[테르툴리아누스]], 치프리아누스, 힐라리오 등 유명한 라틴 교부들의 저서를 탐독하였다.
 
373년에 [[예루살렘]]을 순례한 뒤 안티오키아로 건너가서 라오디게이아의 아폴리나리스 주교에게서 [[성서성경]] 주석 방법과 [[그리스어]]를 배웠고, 그런 도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환시를 경험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열병을 앓고 있었던 그는 환시이후 완쾌되었다 하며 환시에 따라 은둔하며 수도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안티오키아 동편에 있는 카르치스의 광야로 가서 그곳에 사는 많은 은수자들과 더불어 4년 동안 기도와 고행, 공부에만 힘쓰며 수년간 은수 생활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종종 은수생활을 계속할 것인지 그만둘 것인지 망설이고 있을 때, 꿈 속에 예수가 나타나 그에게 “너는 키케로의 추종자이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네 보화가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라고 꾸중했다고 한다.
[[파일:Giovanni Bellini St Jerome Reading in the Countryside.jpg|thumb|right|책을 읽는 히에로니무스]]
꿈에서 깨어난 그는 자신이 받는 유혹을 뿌리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어느 [[랍비]]로부터 [[히브리어]]를 배워 연구를 하였으며, 테베스의 성 파울루스에 관한 전기를 집필하였다.
 
그 후 은수자들 사이에서 아리우스의 이단여부에 관한 문제로 서로 대립하여 분열하는 상황이 일어나자 환멸을 느낀 히에로니무스는 379년에 광야에서 나와 안티오키아로 돌아와서 일정한 사목직을 맡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파울리누스 주교에게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파울리누스를 지원하려는 목적에서 멜레시아누스의 [[이단]] 논쟁에 개입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성서의성경의 라틴어 번역에만 보냈으나, 그 당시에 있었던 몇몇 반 그리스도적인 주장들, 가령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 부인이나 [[신부 (기독교)|사제]] 독신 철폐, [[성인 (종교)|성인]]들의 유해 공경 반대에 대해서 반박하는 글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파일:St Jerome by Rubens dsc01653.jpg|left|thumb|250px|성 제롬, [[페테르 파울 루벤스]] 그림, 1625–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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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ürer-Hieronymus-im-Gehäus.jpg|thumb|200px|left|[[알브레히트 뒤러]]가 새긴 히에로니무스의 모습. 아래에 사자가 보인다.]]
 
== 성서성경 번역 ==
성 히에로니무스의 가장 큰 업적은 391년부터 406년까지 계속된 성서의 라틴어 번역이었다. 391년부터 신약성서를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직접 번역하고, 구약성서의 경우에는 히브리어 원문에서 라틴어로 직접 번역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70인역"(Septuaginta)을 배척하는 유대인 랍비들과 토론을 벌이면서 새로이 번역하였다. 406년까지 계속된 이 엄청난 작업으로 번역된 라틴어 성서에성경에 '불가타벌게이트'(VulgataValgateta, 대중적이라는 뜻)라는 이름이 붙여진붙여서 것은벌게이트판이라고 부른다. 히에로니무스이렇게 불려진 것은 히에로니무스의 당시가당대가 아니라 13세기 때였다. 그 이유는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 성서본이성경본이 원문에 매우 충실하고 정확한 번역일 뿐만 아니라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라틴어로 되어 있었으므로 로마 교회가가톨릭교회는 트렌토(Trento) 공의회에서 이를 공식적인 성서로성경로 인정하였기인정했으나, 모든 기독교파가 단독으로 인정하는 것은 때문이다아니다.
 
== 출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