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에로니무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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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정보
|이름=히에로니무스
|출생일=c.
|사망일=420
|축일=[[9월 30일]] ([[로마 가톨릭 교회|서방 교회]])<br />[[6월 15일]] ([[동방 정교회]])
|교파=[[
|그림=St.-Jerome-In-His-Study.jpg
|그림크기=25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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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성직자, 고해 신부, 교회의 박사
|상징=사자, 추기경 차림새, 십자가, 해골, 나팔, 올빼미, 책과 필기도구
|수호=고고학자, 기록 보관인,
|매장지=[[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이탈리아]], [[로마]]
}}
'''에우세비우스 소프로니우스 히에로니무스'''({{llang|la|Eusebius Sophronius Hieronymus}}, [[
== 행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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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병에 걸려 병상에 눕게 되자 그는 이것이 신이 내린 징벌이라 생각하고 비로소 자신의 죄를 반성하게 되었는데 그 후 갑자기 병이 치유되었으며 그로인해 [[기독교]] 신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주일마다 성지 순례, 특히 카타콤베를 방문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360년에 [[교황 리베리오]]로부터 [[세례성사]]를 받고 로마를 떠나 [[게르마니아]] 지역의 트레비스 시로 가 연구 활동을 계속 하다가 곧 세계 곳곳을 여행한 뒤, 370년경 고향인 아퀼레이아로 돌아와 수사가 되었다. 이때 그는 [[테르툴리아누스]], 치프리아누스, 힐라리오 등 유명한 라틴 교부들의 저서를 탐독하였다.
373년에 [[예루살렘]]을 순례한 뒤 안티오키아로 건너가서 라오디게이아의 아폴리나리스 주교에게서 [[
[[파일:Giovanni Bellini St Jerome Reading in the Countryside.jpg|thumb|right|책을 읽는 히에로니무스]]
꿈에서 깨어난 그는 자신이 받는 유혹을 뿌리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어느 [[랍비]]로부터 [[히브리어]]를 배워 연구를 하였으며, 테베스의 성 파울루스에 관한 전기를 집필하였다.
그 후 은수자들 사이에서 아리우스의 이단여부에 관한 문제로 서로 대립하여 분열하는 상황이 일어나자 환멸을 느낀 히에로니무스는 379년에 광야에서 나와 안티오키아로 돌아와서 일정한 사목직을 맡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파울리누스 주교에게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파울리누스를 지원하려는 목적에서 멜레시아누스의 [[이단]] 논쟁에 개입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파일:St Jerome by Rubens dsc01653.jpg|left|thumb|250px|성 제롬, [[페테르 파울 루벤스]] 그림, 1625–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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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ürer-Hieronymus-im-Gehäus.jpg|thumb|200px|left|[[알브레히트 뒤러]]가 새긴 히에로니무스의 모습. 아래에 사자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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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히에로니무스의 가장 큰 업적은 391년부터 406년까지 계속된 성서의 라틴어 번역이었다. 391년부터 신약성서를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직접 번역하고, 구약성서의 경우에는 히브리어 원문에서 라틴어로 직접 번역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70인역"(Septuaginta)을 배척하는 유대인 랍비들과 토론을 벌이면서 새로이 번역하였다. 406년까지 계속된 이 엄청난 작업으로 번역된 라틴어
==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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