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프랑수아 카르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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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밥티스트 프랑수아 카르토'''(Jean Baptiste François Carteaux, [[1751년]] [[1월 31일]]
==생애==
카르토는 1751년 태어나 화가가 되었다. 화가로써
1793년 8월초쯤 카르토는 중요한 항구인 툴롱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고 [[마르세이유]]로 보내졌다. [[툴롱]]의 시민은 공공연히 반란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영국]]과 [[스페인]]의 함대를 [[항구]]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8월 25일 카르토는 툴롱 포위를 개시했으나 이 포위전술은 적절하지 않았고, 거기에 중요하지 않은 [[오리울]](Ollioules)의 도시에 전력을 집중시켰다. 이 전투 중 카르토의 포병지휘관이던 [[엘지알 오귀스트 도마르탱]](Elzear Auguste Donmartin)이 중상을 입어 군대는 유능한 포병지휘관을 잃어버리는 상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르토는 영국-나폴리 함대에 포격을 퍼부을 마음을 먹고, 오리울 근처의 골짜기에 포대 건설에 노력을 집중했다. 그러나 포대가 완성되고나서 살펴보니 항은 대포의 사정거리 밖에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9월 8일 [[라포와프]] 장군 지휘하 이탈리아 방면군 분견대 6,000명이 툴롱 동쪽에 도착했으나 카르토의 군대와는 별도로 움직였다.
카르토의 정체와 포병의 부적절한 운용이 판명되자, [[공안위원회 (프랑스 혁명)|공안위원회]]의 파견의원인 [[오귀스탱 로베스피에르]]
이 참담한 실패 후 카르토는 나폴레옹에게 새롭게 보강된 영국-나폴리의 요새를 포격하기 위해 복수의 포대를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나폴레옹은 군의 지휘권은 나에게 있다는 카르토의 항의에 상관하지 않고, 작전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확보했다. 10월 하순 나폴레옹은 [[국민 공회]]에 편지를 보냈는데, 그 속에는 상관들의 자질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고, 그들을 ''바보들의 무리''라고 불렀다. 그 결과 카르토는 1793년 11월 11일 해임되고, 얼마 동안 투옥되었다. 지휘권은 [[자크 프랑수아 뒤고미에]] 장군에게 인계되었다.
투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카르토는 [[공포정치]]에서 살아 남았고, 거기에 [[방데]]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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