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쇼 데모크라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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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요우라 내각은 전부 관료가 귀족원 의원중에서 선출된 내각이었기 때문에, 국민들 사이에서는 또다시 헌정옹호를 요구하는 제2차 호헌운동이 일어났다. 이 결과 입헌정우회, 헌정회, 혁신구락푸의 호헌3파가 연합하여 [[가토 다카아키]] 내각이 성립되었다.
 
이 내각은 보통선거법을 제정하여 재산에 의해 제한되었던 선거권을 만 25세 이상인 모든 남자에게 부여하였다. 이로서이로써 일본에서는 제한적 보통선거가 실현되었지만 이는 [[일본 제국]] 정부의 기만책에 불과했다. 당시 소련의 성립과 함께 공산주의 사상이 확산되어 지식인들 및 노동자들 사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던 시기로 [[일본 제국]] 정부는 [[1925년]]에 [[치안유지법]]이 보통선거법과 동시에 제정되어 일본 내에서 [[공산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사상의 자유]]에 제한을 가했다. 이후 공산주의 운동이 격화되자, [[치안유지법]]은 더욱 엄격히 개정되어 최고형을 사형으로 높이게 된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종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