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라노 시게모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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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로운 승진(니조 천황 친정기)===
 
[[오호 (연호)|오호(應保)]] 원년([[1161년]]) 9월, 고시라카와 상황과 다이라노 시게코(平滋子) 사이에서 태어난 황자([[다카쿠라 천황|노리히토憲仁 친왕]])을 황태자로 삼으려는 음모가 발각되었다. 이 사건에서 다이라노 도키타다(平時忠)・다이라노 노리모리(平敎盛)·후지와라노 나리치카 등이 니조 천황에 의해 해관당했지만, 기요모리는 이들에 동조하지 않고 니조 천황을 지원했으므로 천황에게 확고한 신임을 받게 된다. 이에 따라 시게모리도 눈부신 승진을 거듭하여, 오호 2년([[1162년]]) 정월에 정사위하, 10월에 우효에노카미(右兵衛督), 다음 해 정월에는 26세의 젊은 나이로 종3위에 서임되어 공경(公卿)이 되었다. 기요모리는 니조 천황의 친정을 지원하는 한편 법황에 대해서도 렌카오인(蓮華王院, 지금의 교토 산주산겐도三十三間堂)을 지어주는 등의 배려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기요모리는 렌카오인 조영에 대해서도 그 공을 아들 시게모리에게 돌려, [[조칸|조칸(長寛)]] 2년([[1164년]]) 2월, 시게모리는 정3위로 서임되었다. 그 해 9월, 기요모리는 일문의 번영을 기원하고자 일문 사람들과 함께 직접 사경한 불경 33권을 이쓰쿠시마 신사에 기부한다(헤이케노쿄平家納經).
 
조칸 3년([[1165년]]) 4월에 니조 천황이 병으로 쓰러졌다. 중태에 빠진 니조 천황은 기요모리를 산기(參議)로 삼고, 6월에는 황자 노부히토(順仁)에게 양위하고([[로쿠조 천황|로쿠조六條 천황]]) 인쵸(院廳)을 개설하여 그를 시쓰시벳토(執事別當)에 임명하는 등 최후까지 친정에 대한 집념을 보였지만 다음 달인 7월에 붕어한다. 새로 즉위한 천황을 다이라 집안과 후지와라 셋칸케(攝関家)가 보좌하는 체제가 성립하자 시게모리는 [[에이만|에이만(永万)]] 2년([[1166년]]) 4월에 사효에노카미(左兵衛督)가 되었다. 하지만 천황이 어렸던 탓에 몹시 불안했던 정국은 시게모리가 곤노추나곤(権中納言)・우에몬노카미(右衛門督)가 된 7월, 셋쇼(攝政)였던 고노에 모토자네(近衞基實, 후지와라노 모토자네)가 사망하면서 와해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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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모리의 후계자(고시라카와 상황 집권기)===
 
헤이시가 니조 천황파에서 이탈하여 고시라카와 상황을 지지하여, 닌안 원년([[1166년]]) 10월에 헤이시의 피가 섞인 노리히토 친왕이 태자로 책봉된다. 시게모리의 부인 쓰네코와 후지와라노 구니쓰나(藤原邦綱)의 딸 쓰나코가 태자의 유모로 뽑히면서 시게모리는 메노토(乳父)<ref>귀인 자제의 보육을 담당하는 남자</ref>가 되었고, 12월에는 기요모리의 후임으로 도구다이후(東宮大夫)가 된다. [[닌난|닌난(仁安)]] 2년(1167년) 2월에는 곤노다이나곤(権大納言)으로서 칼을 소지하고 궁중에 출입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한편 시게모리의 아버지인 기요모리는 5월 17일에 다죠다이진(太政大臣)에 취임했는데, 이보다 앞선 5월 10일에 시게모리는 [[도산도|도산도(東山道)]]·[[도카이도|도카이도(東海道)]]·[[산요도|산요도(山陽道)]]·[[난카이도|난카이도(南海道)]] 등지의 산과 바다에 출몰하는 도적들을 토벌하라는 선지를 받았다. 이에 따라 국가적인 군사·경찰권을 정식으로 위임받은 시게모리는 명실상부한 기요모리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게 된다. 나아가 [[단고 국|단고(丹後)]]·[[에치젠 국|에치젠(越前)]]을 영지로 받아 경제적으로도 일문 가운데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게모리는 건강이 좋지 않았던 듯, 12월의 동궁의 후미하지메(讀書始)<ref>귀인의 자제가 처음 학습을 시작할 때 치르는 의식</ref>에 불참하고, 다이죠에(大乗會)<ref>호쇼지(法勝寺)에서 매년 10월 치러지는 큰 법회</ref>의 상경(上卿)으로 내정되어 있던 것도 다른 이로 교체하는 등 건강상 문제로 인한 잦은 공식석상 불참이 기록에 보인다. 닌난 3년([[1168년]]) 2월에 아버지 기요모리도 병 때문에 출가하자 정세가 불안해질 것을 걱정한 고시라카와 법황은 태자 노리히토를 즉위시켜([[다카쿠라 천황|다카쿠라高倉 천황]]) 체제의 안정을 꾀했다. 그 뒤 시게모리는 12월에 곤노다이나곤을 사임하였다. 앞서 출가한 기요모리는 후쿠하라(福原)에 은거하고 있었으므로, 로쿠하라에는 시게모리가 남아 일문을 통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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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오의 강소===
 
[[가오|가오(嘉應)]] 원년([[1169년]]) 12월 23일, [[엔랴쿠지|엔랴쿠지(延曆寺)]]의 승도들이 시게모리의 처남이었던 [[오와리 국|오와리(尾張)]]의 영주 후지와라노 나리치카의 유배를 요구하며 강소(強訴)를 벌였다. 황궁을 에워싸고 한창 기세가 등등하던 승병들을 진압하기 위해 당시 게비이시벳토(検非違使別當) 도키타다는 관병을 파견하는 등의 시급한 대응을 진언하였는데, 이 때 시게모리는 관병 3백 기를 이끌고 무네모리·요리모리와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공경 회의에서는 신중론으로 쏠려 있었고 시게모리도 고시라카와 상황의 세 번에 걸친 출동명령을 거부했으므로, 할 수 없이 고시라카와 상황은 나리치카의 유배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곧 반격에 들어가 나리치카를 게비이시벳토에 임명하고 도키타다는 해임되어 나리치카 대신 유배길에 오른다.
 
고시라카와 법황과 엔랴쿠지의 대립은 악화일로로 치달았고, 이러한 정황을 우려한 기요모리는 정월 14일, 시게모리를 후쿠하라로 불러 상황 보고를 받았다. 이렇듯 시게모리는 일문의 대표라고는 해도 중요한 안건에 대해서는 기요모리의 판단을 우선시하는 등 스스로의 의사에 따른 행동은 상당히 제약받고 있었다. 결국 엔랴쿠지 승도들은 나리치카의 해직에 만족하고 물러나는 것으로 상황은 진정되었다. 같은 해 4월에 시게모리는 곤노다이나곤에 복직, 나리치카도 게비이시벳토로 복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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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게모리에 대한 동시대인의 평가는「무용이 뛰어나면서도 마음 씀씀이가 굉장히 온화하다」라는 등의 호의적인 것이 많다. 뛰어난 무인인 동시에 온화하고 배려심 깊은 인물이었다(단, 구조 가네자네九條兼實는 시게모리를 싫어하여, 일기에 시게모리에 대한 비난을 적고 있다). 나카야마 다다치카(中山忠親)가 보낸 문병 사자에 대해서도 "여러 해 동안 품어왔던 것이 막힘없이 이루어지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는 답례의 말을 보냈다. 그 온후하고 성실한 인품으로 고시라카와 천황의 신임이 두터워, 《헤이케 모노가타리(平家物語)》에서도 헤이시 일문의 상식인 같은 존재로 묘사되고 있는 것도, 그 인품이 후세에 전해졌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기요모리와 고시라카와 법황 사이에 있던 시게모리는 헤이시의 동량이라고는 하지만 전권을 장악하지 못하였다. 스스로의 의사를 묻어 두고 조정역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입장이 그의 온후한 성격을 형성했다고 여겨진다. 즉, 그의 성격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노력과 자기 억제에 의한 후천적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호겐·헤이지의 난에서의 용맹한 모습은 감춰두고 있으나, 전하승합사건을 보면 격한 감정을 마음 속 깊이 숨겨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게모리가 남겼다는 "충을 택하자니 효에 어긋나고, 효를 택하자니 충에 어긋나는구나."라는 말도 사실 여부는 불투명하지만 《구칸쇼》에서도 시게모리가 "어서 빨리 죽고 싶구나"라는 삶의 희망을 버린 말을 남기고 있는 등 아버지 기요모리와 고시라카와 법황의 대립 속에서 무력한 상황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더욱이 시게모리는 어머니의 신분이 낮았던 탓에 그를 지원해줄 유력한 친족도 없었던 점, 친형제인 모토모리가 요절한 점도 시게모리의 고립감을 심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복 형제인 도쿠코가 다카쿠라 천황의 중궁으로 들어갔다고는 하나, 실제로 외척으로 중요시된 것은 도쿠코의 동복 형제인 무네모리·도모모리(知盛)·시게히라(重衡) 등이었기에, 헤이시의 동량이라는 지위조차도 안전하지 않은 것이었다(이것은 시게모리 사후 시게모리의 아들 고레모리가 아니라 무네모리가 헤이시의 동량이 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시게모리의 죽음은 기요모리와 고시라카와 법황의 대립을 억제하고 있던 최후의 보루가 사라진 것을 의미하여, 양자의 동맹관계는 완전히 붕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