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교포 북송저지공작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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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한)은 [[1955년]]에 재일 조선인이 극좌급진주의를 지양하고 세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하 조총련)과 긴밀한 제휴 관계를 맺게 되었다.<ref name="kim222">김찬정, 222쪽에서.</ref> 또, 북한은 공산권 각 나라의 지원을 받아 전후 복구를 차차 진행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재일 조선인의 조선 학교에의 지원 등, 자금을 원조해주기도 하였다. <ref name="kim222"/> 한국 정부는 북한의 조선 학교 교육비 원조에 대해 항의하였는데<ref>김찬정, 222 ~ 223쪽에서.</ref>, 반면 한국 정부는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지금의 재일본대한민국민단)으로부터 "지원을 해주지 않는 것"에 대해 항의를 받아 지원을 시작했으나, 그 액수는 북한의 지원액의 10분의 1에 그쳤다.<ref name="kim223">김찬정, 223쪽에서.</ref> 결국 [[재일 한국인]]은 남한 출신자가 99%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남한 정부의 홀대로 북한에 대해 신뢰를 가지게 되어, 대다수가 조총련에 가입하게 되었다.
 
* [[1945년]] [[9월 2일]] ~ [[1952년]] [[4월 28일]],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지령에 따라 재일 한국인 중 다수의 밀입국자와 범죄자가 한국에 강제 송환되었다. 이 중 [[오무라 수용소]]에서만 차출된 송환 대상자의 수가 3,633명이었다.<ref name="kim200">김찬정, 200쪽에서.</ref> 한편, 자신의 송환을 희망한 재일 한국인(조선인) 140만명도 귀환하였다.<ref>[http://www.asahi-net.or.jp/~dt9k-iwmt/kobeya/kousatu/ko21.htm 재일 조선인 귀국 문제의 진상: 일본 적십자사]</ref><ref name=asahi19590713> 아사히 신문, 1959년 7월 31일 2면 〈태반이 자유 의지로 거주… 외무성, 재일 조선인에게 발표한 전쟁 중 징용인 수는 245명〉({{lang|ja|大半、自由意思で居住 外務省、在日朝鮮人で発表 戦時徴用は245人}})</ref><ref name=asahi19590714>아사히 신문, 1959년 7월 14일 석간 2면 〈"외무성 발표는 엉터리"… 징용자의 수에 대해 조총련이 반론〉({{lang|ja|外務省発表はデタラメ、徴用者の数 朝鮮総連が反論}}</ref><ref>{{cite news
| url = http://megalodon.jp/2010-0312-0059-38/sankei.jp.msn.com/politics/policy/100311/plc1003111306007-n1.htm
| title = 재일 조선인, 전시 징용은 약 245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