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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후반 ===
[[정미환국]]으로 발언권을 얻게 된 [[소론]]은 민진원이 완성한 《숙종실록》이 당의(黨意)<ref>민진원의 당파인 노론을 뜻한다. 실제로 숙종실록엔 [[노론]]은 반백성이 칭송을 금치 않은 만고의 충신으로, [[소론]]은 무식하고 간사하며 반역당인 [[남인]]과 악녀 [[희빈 장씨]] 모자에게 아첨하는 간신의 무리로, [[남인]]은 반역의 무리로 묘사되어 있다.</ref>와 사의(私意)<ref>[[인현왕후]]가 포함된 민진원의 일족에 대한 평가와 [[인현왕후]]의 정적이었던 [[희빈 장씨]]에 대한 평가가 실린 주관적이고 편파적인 기사를 뜻한다.</ref>에 따라 고의로 기사를 누락하거나 왜곡시킨 부분이 많아 전면 개정이 불가피하다 주장하였지만 집권당인 노론의 반대에 부딪힌 탓에 일부 내용만 보정한 《숙종실록보궐정오》가 만들어졌다.<ref>영조실록 13권, 3년(1727 정미 / 청 옹정(雍正) 5년) 9월 18일(신미) 2번째기사 </ref> 다음해인 [[1728년]] 음력 3월, [[소론]] 강경세력이 지방에 은신 중인 [[남인]]을 규합하여 삼남지역에서 대규모의 난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이인좌의 난]]이다.<ref>영조실록 16권, 4년(1728 무신 / 청 옹정(雍正) 6년) 3월 15일(을축) 6번째기사 </ref> 이 사건으로 [[소론]]에게 강한 불신감을 갖게 된 [[조선 영조|영조]]는 [[노론]] 강경세력의 영수로 활동해온 민진원을 성모(聖母: 왕의 법모를 말한다. [[인현왕후]]를 뜻함)의 혈족이라는 이유를 붙여 다시 조정에 불러들였으며, 민진원은 토역을 청하여<ref>영조 24권, 5년(1729 기유 / 청 옹정(雍正) 7년) 12월 7일(정미) 3번째기사 </ref> 숙적인 [[소론]]과 [[남인]]에게 이인좌의 잔당이라는 죄목을 붙여 대거 숙청한다. 1729년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며 《가족제복론(加足帝腹論)》을 찬하였다. 1730년 [[기로소]]에 들고 1733년 [[봉조하]]에 들었다가 1736년 11월 28일 사망하였다.<ref>영조실록 42권, 12년(1736 병진 / 청 건륭(乾隆) 1년) 11월 28일(정사) 1번째기사 </ref>
한편 그가 참여하여 완성시킨 《숙종실록》은 [[소론]]과 [[남인]]에 의해 고의로 기사를 빼거나 왜곡시킨 부분이 많아 전면 개정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거세게 일어났지만 노론의 반대에 부딪혀 일부 내용만 보정한 《숙종실록보궐정오》가 만들어졌다. [[1728년]] 성모(聖母: 왕의 법모를 말한다. [[인현왕후]]를 뜻함)의 혈족이라는 이유로 특별히 풀려났다. 1729년 영중추부사가 되어 《가족제복론(加足帝腹論)》을 찬하였다.
 
저서에 《단암주의(丹巖奏議)》 《연행록(燕行錄)》 《민문충공주의(閔文忠公奏議)》 등이 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고 한다. 사후 [[조선 영조|영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 저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