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관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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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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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2=300,000명
|사상자1=기록 없음
|사상자2= 전멸<br />(양량 도주)}}
'''임유관 대첩전투'''(臨渝關大捷戰鬪)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에서전쟁인 임유관(산해관)을[[고수전쟁]] 중심으로 수륙에서제1차 30만전쟁에서 수나라군을벌어진 물리치고전투이다. 승리한임유관을 제1차중심으로 [[고수전쟁]]을수나라의 30만 병력을 물리쳤다고 말한다한다. 지금은다만 전해져 내려오지전투는 않는[[진주 《서곽잡록(西郭雜錄)》과강씨 《대동운해(大東韻海강이식)》에|진주 실린강씨]]의 내용을족보 단재 [[신채호]]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에만 등장하며 실제 사건인지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국내외 다른 사료에는 1차 고수전쟁의 경과를 보급 부족 및 장마·태풍으로 인해 자진 철퇴한 것으로 밝힌기록하고 내용이다있다.
 
== 개요 ==
=== 원인 ===
[[581년]], [[수 문제]] 양견은 황제에 등극하고, [[589년]]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진주 강씨 (강이식)|진주 강씨]] 족보에 따르면 [[597년]]([[고구려]] [[영양왕]] 8년), 수나라는 국력을 과시하고자 고구려에 신하의 예로써 분수를 지키라는 모욕적인 국서를 보내 고구려를 도발하였다. 이에 대노한 영양왕은 신하들과 답서를 보낼 것을 의논하였고 [[강이식]]은 "이같이 오만 무례한 글은 붓으로 화답할 것이 아니요 칼로 화답할 것입니다."며 전쟁을 벌일 것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이후 벌어진 전투 역시 강이식이 병마원수(兵馬元帥)가 되어 주도하였다고 하나 [[진주 강씨 (강이식)|진주 강씨]] 족보 및 그에 근거한 후대의 사료를 제외하면 강이식의 이름과 활약은 전혀 전하지 않는다.
 
=== 고구려의임유관 선제공격전투 ===
{{참조|고구려-수 전쟁}}
이에 대노한 영양왕은 신하들과 답서를 보낼 것을 의논하였다. 장군 [[강이식]]은 "이같이 오만 무례한 글은 붓으로 화답할 것이 아니요 칼로 화답할 것입니다."며 전쟁을 벌일 것을 주장하여 영양왕은 개전을 결심한다. [[598년]] 강이식을 병마도원수를 삼아 정병 5만을 거느리고 임유관을 선제공격하게 하고, 먼저 [[말갈족|말갈]] 군사 1만으로 하여금 요서에 침입하여 수의 군사를 유인하였고, [[거란족|거란]] 군사 수천명으로 바다를 건너가 지금의 [[산둥 성|산동]](山東)을 침으로써 고구려와 수나라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개전을 결의한 영양왕은 강이식을 병마원수로 삼아 정병 5만으로 임유관을 공격하게 하였다. 먼저 [[말갈족|말갈]] 군사 1만으로 하여금 요서에 침입하여 수의 군사를 유인하였고, [[거란족|거란]] 군사 수천명으로 바다를 건너가 지금의 [[산둥 성|산동]](山東)을 침으로써 고구려와 수나라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강이식은 수나라의 영주총관(營州總管) 위충 (韋沖)과 접전하다 거짓으로 패하였고, 이에 분노한 수 문제는 양양(楊諒)에게 30만의 대군을 주어 임유관에서 출정하게 하고 주나후(周羅喉)에게 수군을 맡겼다. 주나후는 수군을 이끌고 평양으로 나아가겠다고 소문을 퍼뜨렸으나 강이식은 속임수를 간파하고 요하로 향하는 수군을 요격하여 격파하였다. 이후 성채를 지키면서 지구전을 펼쳐 수나라 군대는 양식이 떨어지고 장마로 인해 전염병이 돌아 퇴군하였다. 강이식이 이를 추격하여 임유관에서 섬멸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전과는 [[진주 강씨 (강이식)|진주 강씨]] 족보 및 그에 근거한 후대의 사료에만 기록되어 있으며, 다른 국내외 사료에는 고구려가 말갈 군사 1만으로 요서를 침입하였다가 영주총관 위충에게 격퇴된 사실만 기록되어 있다. 이후 벌어진 수나라의 1차 공격도 특별한 전투 없이 요하 인근까지 진출하였다가 군량 부족 및 전염병, 폭풍우 등으로 인해 퇴각한 것으로 나타난다. [[신채호]]는 이러한 기록은 중국 측에서 패배를 감추기 위해 왜곡하여 기록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 수나라의 대응 ===
이듬해 고구려의 군사가 요서에 침입하여 영주총관 [[위충]]과 접전을 벌이다가 패한 체 하며, 퇴각을 하자 수 문제는 30만 대군을 모아 네째 아들 한왕 양량(楊諒)을 총사령관인 행군대총관에 임명하여 육군을 통솔하게 하고, 주라후(周羅睺)를 수군총관으로 임명하여 바다로 진격하게 하였다. 주라후는 평양으로 진격한다는 헛소문을 퍼트렸지만, 실제 수군의 목표는 육군의 보급이 목적이었다.
이에 강이식은 육로로 적을 유인하여 마치 육군을 치러가는체하며 수나라 수군을 급습하여 전멸시켜버린다.
군 중에 명을 내려 수성에만 몰두하게 하였다.
 
== 결과 ==
결국 수나라는 보급에서 문제를 일으켰고, 6월 장마철에 질병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으며 고구려 군은 사기가 떨어진 수나라 군대를 섬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히고 수많은 무기를 노획하여 개선하였다. 임유관 전쟁 이후에 수 문제는 고구려를 두려워하여 다시 군사를 일으킬 생각을 하지 못했으며, 휴전 조약을 맺고 상품 무역을 다시 시작하여 두 나라 사이에 10여 년 동안이나 아무 일이 없었다.
 
== 참고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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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수대첩]]
* [[산해관]] (임유관)
 
== 주석 ==
{{주석}}
 
[[분류:59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