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범: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편집 요약 없음
잔글편집 요약 없음
4번째 줄:
[[건안]]([[196년]] ~ [[220년]]) 말에 [[조조]]의 승상부에 출사했으며, [[연강]] 중([[220년]])에는 우림좌감을 지냈다. [[왕상 (희백)|왕상]] 등과 함께 [[황람]] 편집에도 참여했다.<ref>[[어환]]: 《위략》 ([[진수 (서진)|진수]]의 《[[삼국지]]》 권9 제하후조전의 배송지주에서 재인용): 桓範字元則,世為冠族。建安末,入丞相府。延康中,為羽林左監。以有文學,與王象等典集皇覽。</ref>
 
명제 [[조예]]의 치세에 중령군상서가 되었으며, 정로장군 · 동중랑장 · 사지절이 되어 청주와 [[서주 (고대 중국)|서주]]의 군사를 감독(도독청서제군사)하며 하비에 치소를 두었다. 서주자사 정기와 다투어 사지절의 권한으로 참형에 처하려 했으나, 조정에서는 환범이 그르다고 판단해 오히려 면직되었다. 후에 연주자사가 되었으나 만족하지 못하던 차에, 기주목으로[[기주]]목으로 전임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기주목의 상관인 정북장군은 환범의 후배인 여소(呂昭)이기 때문에, 환범은 취임하지 않으려 했다. 환범의 아내 중장씨는 환범에게서 이 말을 듣고 예전에 다른 관리와 다투다가 실패한 점을 들어 조언했지만, 이를 듣고 분노한 환범은 칼고리로 임신 중인 아내의 배를 들이받아 낙태시켰다. 그리고 병을 칭탈하여 기주목으로 부임하지 않았다.<ref>위와 같음, 明帝時為中 領軍尚書,遷征虜將軍、東中郎將,使持節都督青、徐諸軍事,治下邳。與徐州刺史鄭岐爭屋,引節欲斬岐,為岐所奏,不直,坐免還。復為兗州刺吏,怏怏不得意。又聞當轉為冀州牧。是時冀州統屬鎮北,而鎮北將軍呂昭才實仕進,本在範後。範謂其妻仲長曰:「我寧作諸卿,向三公長跪耳,不能為呂子展屈也。」其妻曰:「君前在東,坐欲擅斬徐州刺史,眾人謂君難為作下,今復羞為呂屈,是復難為作上也。」範忿其言觸實,乃以刀環撞其腹。妻時懷孕,遂墮胎死。範亦竟稱疾,不赴冀州。</ref>
 
[[위 애제]]가 즉위한 [[정시 (위)|정시]] 중([[240년]] ~ [[249년]])에 대사농이 되었다. 재임 중에는 청렴하고 간명하다는 평을 받았다.<ref>위와 같음, 正始中拜大司農。範前在臺閣,號為曉事,及為司農,又以清省稱。 </ref> 애제의 보정 중 하나인 대장군 [[조상 (조위)|조상]]과는 고향 선배로서 9경 중에서도 특히 존경을 받았으나, 그다지 친근하지 못했다.<ref>위와 같음, 于時曹爽輔政,以範鄉里老宿,於九卿中特敬之,然不甚親也。</ref> 조상이 형제들을 자주 거느리고 자주 놀러나가자, 도성 안에 변고가 생겼을 때의 낭패를 생각하도록 간하여 이후로는 한동안 조상 형제가 한꺼번에 도성을 비우지 않았다.<ref>곽반: 《위진세어》 (진수의 삼국지 권9 제하후조전의 배송지 주석에서 재인용) 爽兄弟先是數俱出游,桓範謂曰:「總萬機,典禁兵,不宜並出,若有閉城門,誰復內入者?」爽曰:「誰敢爾邪!」由此不復並行。至是乃盡出也。</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