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자호
1946년 교통부에서 광복을 기념하기 위해 운행되었던 열차의 명칭
해방자호(解放者號)는 1940년대 중반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특급열차로 운행한 열차의 이름이다. 서울-부산 간의 조선해방자호(朝鮮解放者號)와 서울-목포 간의 서부해방자호(西部解放者號)로 나뉘었다.
역사 편집
편성과 운행 편집
조선해방자호는 초기에 전망객차 1량, 우등객차 2량, 1등객차 5량, 식당차 1량이 연결된 9량 편성으로 운행하였으며, 정원은 전망객차에 8명, 우등객차에 144명, 1등객차에 360명이 탑승할 수 있어 총 512명이었다.[6] 그러나 보통열차와는 다르게 상당히 호화로운 편성이어서 논란이 일었고[6], 이용객이 적어 3개월만에 운휴하였다.[2] 이듬해 5월에 1등객차에 15명, 2등객차에 110명, 3등객차에 360명이 탑승하는 것으로 편성을 바꾸어 운행을 재개하였다.[3]
조선해방자호의 정차역은 서울역, 천안역, 대구역, 김천역, 삼랑진역, 부산역으로, 이 거리를 가는 데에 9시간 40분이 소요되었다.[7] 서부해방자호의 경우 초기의 정차역은 불명이나, 1948년 8월 25일부터 시흥역, 평택역, 신태인역, 장성역, 영산포역에 추가로 정차하게 되었다.[8]
각주 편집
- ↑ 독립의전위로매진할 빗나는해방자호용자, 《자유신문》, 1946.05.20.
- ↑ 가 나 해방자호는 운휴, 《자유신문》, 1946.08.16.
- ↑ 가 나 특급「해방자호」 여객제한취급, 《자유신문》, 1947.04.16.
- ↑ 서부해방자호호남을달린다, 《경향신문》, 1948.06.27.
- ↑ "삼천리와무궁화" 해방자호를각각개명, 《경향신문》, 1949.08.13.
- ↑ 가 나 살인적승차난에역행, 공차운전의 『해방자호』, 《자유신문》, 1946.05.21.
- ↑ 우리손으로된특급열차, 《자유신문》, 1946.05.04.
- ↑ 서부해방자호, 《경향신문》, 1948.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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