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문두리족

헤르문두리족(Hermunduri, Hermanduri, Hermunduli, Hermonduri, Hermonduli)은 고대 게르만 부족으로, 1세기부터 3세기까지 오늘날 보헤미아에 해당하는 엘베강 수원 인근 내륙에 거주했었으며 좀 더 북쪽에 있는 튀링겐과도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명칭의 유사성을 근거로 한 옛 이론에 따르면, 투링기족이 헤르문두리의 후손이라고 한다. 이따금식, 헤르문두리족은 로마가 있는 도나우 국경선으로 이동하였다.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는 저서인 지리학에서 이 부족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대신 관련이 되어 있을 것으로 보이는 테우리오카이마이족을 언급한다.

1세기 당시 그리스-로마 저술가들에 기록에 따른 일부 게르만 부족들의 대략적 위치. 빨강은 수에비족 계통, 보라는 임리노네스족 계통.

역사 편집

스트라본은 헤르문두리족을 엘베강 동쪽에 살며 유목 생활을 하는 수에비족으로 다뤘다.[1]

현재 수에비족은, 레누스강(라인강)에서부터 알비스강(엘베강)까지 이르는등 규모가 가장 크며, 이들 부족 중에 일부는 알비스강의 먼 곳까지 거주하는데 예시로, 헤르문두리족과 랑고바르디족이 있다. 현 시점에서 마지막에 언급한 부족들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자신들의 땅에서 알비스강의 먼 쪽에 있는 곳까지 밀려 들어왔다.

카시우스 디오는 서기 1년에 도미티우스라는 이름의 한 로마인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기원전 16년 집정관)로 추정)에 대해 "이스테르강(다뉴브강)을 따라 지역들을 다스리고 있는 동안에, 어떠한 이유로 자신들의 땅을 떠나 또 다른 땅을 찾고 있던 헤르문두리족을 막아섰고, 그는 이들을 마르코만니족의 영토 일부에 정착시켰다. 그 뒤에 그는 어떠한 문제 없이 알비스강을 건너가 반대편 쪽의 야만족들과 우호적인 동맹을 맺었고, 강둑에 아우구스투스의 제단을 세웠다"라고 기록하였다.[2]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역시도 이들의 위치에 대해 묘사했다:

야만성에 있어 어떠한 게르만족보다 앞선 종족인 랑고바르디족의 우세가 무너졌고, 마침내 이는 심지어 희망으로도 결코 품어보지 못한 것이었는데, 군단기를 든 로마군은 라인강 너머 저 멀리 셈노네스족과 헤르문두리족의 영토까지 흐르는 엘베강까지 400마일을 건너갔는데, 이는 결코 이전에 시도해보지 못한 것이었다.[3]

대 플리니우스는 저서인 '박물지'에 헤르문두리족을 만누스로부터 내려오는 후예인 헤르미오네스족 중 하나로 기재했다. 동일 분류에 그는 카티족, 케루스키족, 수에비족도 놓았다.[4]

타키투스는 '게르마니아'에서, 수에비족의 일부를 언급하고, 이들을 도나우강 근처와 엘베강 수원 근처에 배치시킨 뒤에 헤르문두리족을 묘사한다:

우리와 가까운 곳에 헤르문두리족의 나라가 있으며, 이들은 로마의 충실한 민족들이었다. 이에 따라 이들은 게르만족 중에 단독으로, 강둑에서만이 아니라, 저 멀리 내륙까지, 라이티아 속주의 가장 번영하는 식민지까지 교역 활동을 하였다. 이들이 경호원 없이 지나갈 수 있는 어느 곳이던, 다른 부족들에게는 우리의 무기와 군영만을 보여줬지만, 이들에게는 저들이 탐내지 않아하는 우리의 집과 터전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이들의 영토에는 지난 날 우리들에게 알려진 유명한 강인 엘베강이 솟아 흐르며, 지금은 그에 대해 들어볼 수만 있을 뿐이다.[5]Tac. Ger. 41

타키투스는 '편년사'에서, 헤르문두리족 출신의 비빌리우스가 서기 18년에 콰디족반니우스의 편을 들며 어떻게 마르코만니족의 왕 카투알다를 전복시켰는지를 기술하고 있다.[6] 50년경, 반니우스의 조카들인 반기오와 시도 그리고 반니우스와 동맹 관계의 루기족 등과 동맹을 맺은, 비빌리우스는 마찬가지로 반니우스의 폐위를 주도했다.[7] 58년에 헤르문두리족은 종교적으로 중요성을 띠는 강을 두고 일어난 국경 분쟁에서 카티족승리를 거뒀다.

헤르문두리족은 베라강 혹은 잘레강으로 추정되는 강을 따라 있고 근처에 소금 비축지가 있는 논란의 국경선을 카티족과 공유했었다. 헤르문두리족은 이 분쟁에서 승리하였다.[8]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서기 180년에 사망했을 당시, 그는 마르코만니족, 헤르문두리족, 사르마티아족, 콰디족 등으로 구성된 동맹 세력과 전쟁 중이었다.[9]

일부는 헤르문두리족의 '두리'(-duri)가 오탈자 '투리'(-thuri)를 나타내는 것일 수 있고, 뒤에는 게르만어 어미(-ing)는 후예를 나타내기에, 헤르문두리족의 잔여 세력이 투링기족이 되었다고 주장한다.[10] 이는 마티아스 스프링거Matthias Springer) 등의 다른 학자들로부터 반박당하고 있다.[11]

헤르문두리족의 왕 편집

각주 편집

  1. Strabo (1924) [c.20 CE]. H L Jones, 편집. 《Geography》 (Perseus Digital Library). Book 7 Chapter 1.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 William Heinemann (London). 
  2. Cassius Dio (1917). 《Roman History》 (Thayer Lacus Curtius). VI Book LV. Loeb Classical Library. 
  3. Velleius Paterculus, Roman History, 2.106
  4. Pliny the Elder (1855) [c.77–79 CE]. John Bostock; H T Riley, 편집. 《The Natural History》 (Perseus Digital Library). 《Complete Works of Tacitus》. Chapter 28 – Germany (London: Taylor and Francis). 
  5. Cornelius Tacitus (1942) [c.98 CE]. Alfred John Church; William Jackson Brodribb & Lisa Cerrato, 편집. 《Germany and its Tribes》 (Perseus Digital Library). 《Complete Works of Tacitus》. Chapter 41 (New York: Random House). 
  6. Tacitus. The Annals.2.63
  7. Cornelius Tacitus (1942) [c.117 CE]. Alfred John Church; William Jackson Brodribb & Lisa Cerrato, 편집. 《편년사》 (Perseus Digital Library). 《Complete Works of Tacitus》. Book XII Chapter 29 (New York: Random House). 
  8. Cornelius Tacitus (1942) [c.117 CE]. Alfred John Church; William Jackson Brodribb & Lisa Cerrato, 편집. 《편년사》 (Perseus Digital Library). 《Complete Works of Tacitus》. Book XIII Chapter 57 (New York: Random House). 
  9. ? "Julius Capitolinus" (1921) [c.395 CE].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전 Part 2 chapter 27 (Thayer Lacus Curtius).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I (Loeb Classical Library). 
  10. Schutz, 402.
  11. Springer, Matthias, 〈Zwischen (H)Ermunduren und Thüringern besteht kein Zusammenhang〉, 《Germanische Altertumskunde Online》 
  12. Tac. Ann. 2.63; 12.29

참고 문헌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