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령 인도
회사령 인도(영어: Company rule in India)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인도 아대륙에 두었던 식민지를 말한다. 빅토리아 여왕이 영국 동인도 회사를 없애면서 영국 정부가 직접 통치하도록 하였다.
회사령 인도 | ||||
---|---|---|---|---|
Company rule in India | ||||
| ||||
표어 | 잉글랜드 국왕과 의회의 명령으로 Auspicio Regis et Senatus Angliae | |||
1805년 당시 회사령 인도 | ||||
수도 | 캘커타 | |||
정치 | ||||
정치체제 | 식민지 | |||
총독 1774년–75년(초대) 1857년–58년(말대) | 워렌 헤이스팅스 찰스 캐닝 | |||
지리 | ||||
1858년 어림 면적 | 1,942,481 km2 | |||
인문 | ||||
공용어 | 영어 | |||
경제 | ||||
통화 | 루피 |
역사
편집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동인도 회사와 영국이 프랑스와 무굴 제국에 대해 승리하기 전까지 콜카타, 첸나이, 봄베이 등의 동인도 회사 영토는 대부분 자치적이고 산발적으로 관리가 불가능한 상인들로 구성된 마을 의회에 의해 통치되었다.[1] 마을 의회는 지역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에 충분한 권한을 갖지 못했고, 뒤이어 인도에서의 회사 운영 전반에 대한 감독 인력 부족은 회사 임원 및 그들의 동맹이 통치지역 내에서 불평등하고 잔학한 통치를 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1] 플라시 전투에서의 승리와, 이어진 북사르 전투를 통해 1765년 알라하바드 조약에서 동인도 회사가 벵골 지역의 징세권을 양도받자 영국 본토의 시민들도 인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1] 이후 회사의 자금 관리 관행에 의문이 제기되었는데, 특히 인도의 태수 나바브들이 영국으로 막대한 부를 들여오는데에도 회사가 적자를 기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2] 1772년까지 회사는 파산하지 않기 위해 영국 정부의 대출이 필요했고, 런던에서는 회사의 비리와 부패가 곧 영국의 사업 전반과 공공 생활까지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3] 회사의 새로운 영토에 대한 영국 정부의 권리와 의무 또한 검토되었다.[4] 영국 의회는 여러 차례 조사원을 파견했고, 1773년 노스 경 프레더릭 노스의 재임 기간중에 "동인도 회사의 업무 관리를 개선하기 위해,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도에서도"라는 긴 제목으로 〈규제법Regulating Act〉이 제정되는데 이르렀다.[5]
노스 경은 영국 정부가 회사 통치령을 인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6] 시티오브런던과 영국 의회 등은 노스 경의 생각에 반대했다.[7] 결과적으로 제정된 〈규제법〉에서는 동인도 회사가 영국 왕실을 대신하여 인도에서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며, 새로운 영토들에 대한 영국 왕실의 궁극적인 주권을 암시하였다. 그 결과 회사령은 동인도 회사뿐 아니라 영국 정부 및 의회의 감독과 규제 아래에 놓였다.[8] 회사의 이사회는 법에 따라 영국 정부의 조사를 위해 인도의 민간, 군사 및 수입 문제에 관한 모든 통신을 제출해야 했다.[9]
1783년, 외무장관 찰스 폭스와 노스 경은 손을 잡고 에드먼드 버크가 인도에 대한 정치적 권력을 동인도 회사에서 의회 위원회로 이양하는 법안을 제출하면서 식민지 정책을 다시 개혁하려고 시도했다. 이 법안은 찰스 폭스의 열렬한 지지로 하원을 통과했지만 조지 3세의 압력으로 상원에서 거부권을 행사했다. 조지 3세는 이후 폭스와 노스 연대를 해산시키고 윌리엄 피트 주도에 새 내각을 구성했다. 피트의 인도법은 인도의 정치 권력을 동인도 회사에 남겨두었지만, 동인도 회사의 업무를 감독하고 회사의 주주들이 인도의 통치에 필요 이상으로 간섭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국에 이사회를 설립함으로써 그들을 견제했다.[10][11] 이 위원회는 6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영국 내각의 국무장관 1명과 재무장관 1명이 포함되어 있었다.[12] 이 무렵 영국 의회에서는 벵골의 토지 소유권 문제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 결과, 워런 헤이스팅스의 정적이었던 필립 프랜시스가 주장한 견해를 지지하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벵골의 모든 토지는 "토착 토지 소유자와 가족의 재산"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3]
벵골에서 회사 직원들에 의한 학대와 부패에 대한 보고를 의식한 피트의 인도법은 여러 권리를 부당하게 박탈당했다는 수많은 불만에 주목했다.[14] 동시에 회사의 이사들은 벵골의 토지세 징수 권한을 확고히 해야 한다는 프랜시스의 견해에 기울어 영구적인 정착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15] 인도법은 또한 3개 주(presidency)에 각각 다수의 행정직과 군사직을 신설했는데, 주지사 1명과 평의원 3명을 여기에 포함시켰으며 평의원중에는 주의 군대 최고 사령관 1인을 포함시켰다.[16] 벵골 총독부의 감독권은 1793년 헌장에 따라 확장되었다.[17]
곧 런던의 상인들 사이에서는 1600년에 네덜란드와 프랑스를 의식해 동인도 회사에 부여한 독점권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소문이 돌았다.[18] 1813년 헌장에 의해 부여된 권력에 의해 영국 의회는 회사의 헌장을 갱신하였으며, 중국과의 차와 무역을 제외한 다른 무역에 대한 회사의 독점권을 종료하고 인도를 민간 투자와 선교사들에게 개방했다.[19] 인도에서 영국의 영향력이 증가함에 따라, 영국 왕실과 의회에 의한 인도 문제에 대한 감독도 증가했다. 1820년대까지 영국 국민들은 3개 주에서 왕실의 보호 아래 사업을 하거나 선교 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19] 1833년 세인트헬레나 법에 따라 영국 의회는 중국 무역에 대한 회사의 독점권을 취소하고 회사를 영국령 인도 행정부의 대리인으로 삼았다.[19] 벵골 총독은 인도 총독으로 재지정되었다. 총독과 그의 행정 위원회는 영국령 인도 전체에 대한 독점적인 입법권을 부여받았다.[18] 북인도의 영국 영토가 델리까지 확장되었고, 1856년 아와드가 여기에 합병되었다. 1854년 벵골, 비하르, 오디샤 지역에 부총독이 임명됨에 따라 총독은 인도 전체의 통치를 맡게 되었다.[18] 1857년 인도에서 벌어진 세포이 항쟁에 대한 대처로 1858년 제정된 인도법에 따라 동인도 회사의 행정권이 영국 왕실 및 의회에 완전히 넘어가며,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제국의 군주로 즉위하게 되고 회사령 인도는 막을 내린다.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가 나 다 Bandyopadhyay 2004, 76쪽 , Imperial Gazetteer of India vol. IV 1909, 14쪽
- ↑ Imperial Gazetteer of India vol. IV 1909, 14쪽 , Peers 2006, 35쪽 , Bandyopadhyay 2004, 76쪽
- ↑ Peers 2006, 35쪽
- ↑ Marshall 2007, 207쪽
- ↑ Imperial Gazetteer of India vol. IV 1909, 14쪽
- ↑ Marshall 2007, 207쪽
- ↑ Peers 2006, 35쪽
- ↑ Marshall 2007, 197쪽
- ↑ Bandyopadhyay 2004, 77쪽
- ↑ Campbell, John (2010). 《Pistols at Dawn: Two Hundred Years of Political Rivalry from Pitt and Fox to Blair and Brown》. Internet Archive. London: Vintage. 23–34쪽. ISBN 978-1-84595-091-0.
- ↑ Travers 2007, 211쪽
- ↑ Bandyopadhyay 2004, 77쪽
- ↑ Quoted in Travers 2007, 213쪽
- ↑ Quoted in Travers 2007, 213쪽
- ↑ Guha 1995, 161쪽
- ↑ Bandyopadhyay 2004, 78쪽
- ↑ Imperial Gazetteer of India vol. IV 1909, 15쪽
- ↑ 가 나 다 Imperial Gazetteer of India vol. IV 1909, 15쪽
- ↑ 가 나 다 Ludden 2002, 134쪽
외부 링크
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회사령 인도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