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기간 필리핀의 군사사

한국 전쟁 참전국 중 필리핀은 1950년부터 1955년까지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 총 7420명이 파병되었다.

필리핀의 국기

부대 설명 편집

필리핀은 총 5개 대대와 7천여 명의 장병을 1950년부터 1955년까지 {필리핀 한국 원정군 (PEFTOK: Philippine Expeditionary Force To Korea)로 파병 지원하였다.[1]

참전부대 및 지휘관[2][1]
부대명 지휘관 비고
계급 성명 참전기간
제10대대전투단(Stead On) 중령 Mariano C. Azurin 1950.09~1950.11 미 제25사단, 미 제187공수연대, 마 제3사단 배속
중령 Dionisio S. Ojeda 1950.12~1951.09
제20대대전투단(Leaders) 중령 Salvador Abcede 1951.09~1952.06 미 제3, 45사단 배속
제19대대전투단(Bloodhounds) 중령 Ramon Z. Aquirre 1952.06~1953.04 미 제45사단 배속
제14대대전투단(Avengers) 중령 Nicanor Jimenez 1953.04~1954.04 미 제45사단 배속
제2대대전투단(Black Lions) 중령 Antonio De Veyra 1954.04~1955.05

한국 전쟁 참전 배경 편집

 
엘피디오 키리노 (Elpidio Rivera Quirino, 1890년 11월 16일 - 1956년 2월 29일)

필리핀은 휴전 협정 이후인 1954년이 되어서야 서울에 공사관을 설치하였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한국에 상주하는 필리핀 외교사절이 없었음은 물론이고 국가간 교역이나 민간교류 또한 활발하지 않았다. 한국 잔젱 당시 필리핀-미국 관계에 핵심 인물이던 제4차 국제연합 총회 의장인 카를로스 로물 로와 당시 미국 주재 필리핀 대사로 워싱턴에 있던 미구엘 엘리살데는 다수의 채널을 통해 한국의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신속하게 파병 및 참전 주장을 전개하였으며 미국과 국제 연합의 요청에 발 빠르게 반응하였다.[3]

국제연합은 한국전쟁을 "대한민국을 적화시키기 위하여 공산세력이 일으킨 불법 도발"로 규정하였다. 1950년 6월 27일 미 국무부는 당시 미 극동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를 한반도 작전의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맥아더는 필리핀 탈환전의 영웅이었으며 맥아더가 공산세력으로부터 한국을 보호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한다는 소식은 필리핀에 큰 국민적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마닐라 타임스에서 필리핀 스카우트 연맹(National Federation of Philippine Scout)은 미국과 함께 참전할의사가 있음을 밝히며 필리핀과 미국에 대한 충성심을 재고하는 결의문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고 밝혔다. 필리핀 스카우트 연맹은 31000명이 넘는 퇴역군인들로 형성된 단체로 이들의 반응은 필리핀이 개전당시 한국전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보여주는 극명한 예이다.[3]

당시 필리핀 대통령이 었던 카리노 대통령과 집권당이었던 국민당과 군부는 한국전쟁에 대한 판단을 쉽사리 내릴 수 없었으며 신중히 대외정세를 살폈다. 하지만 전쟁 발발 이후 미국과 유엔은 모든 제도적 수단을 통해 불법 침략을 범한 북한을 규탄하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수호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한국을 위해 싸워줄 것을 열국에 호소하였다. 필리핀은 이러한 미국과 국제연합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다.[3]

"오늘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 경이적인 새 장을 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우리의 땅에 우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웠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그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외국땅으로 나갑니다. 우리는 가난합니다. 조국은 여러분들을 위대한 희생양으로 한국으로 보내게 되나, 여러분에게 투자한 모든 돈은 우리의 항구적인 해방과 자유를 위한 견실한 투자입니다" -해외파병장병 환송식에서 키리노 대통령

필리핀과 미국 편집

 
미서전쟁(Spanish-American War)

필리핀과 미국이 처음부터 우호적인 관계였던 것은 아니다. 필리핀(Philippines)의 국호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Felipe II)의 이름에서 따왔을 정도로 필리핀은 스페인 통치에 크게 영향을 받은 국가임은 물론 1521년 마젤란 함대의 도래와 1565년 레가스피(Miguel Lopez de Legazpi) 탐험대에 의한 식민지 건설이 국가의 시원이라 봐도 무방하다.[4]

1898년 미서전쟁(Spanish-American War)과 파리조약으로 필리핀에 통치권이 미국으로 넘어가게 된다. 333년 간 스페인의 통치 아래 필리핀의 문화는 많은 부분을 스페인과 히스패닉 문화들과 공유하고 있었다. 이에 미국은 효율적인 식민 통치를 위해 스페인 문화를 청산하기 위해 노력한다. 몰락하고 있는 스페인의 모습과 신흥 강대국으로서 부상하고 있는 미국의 모습을 대비시키며 국민적 호감을 돌리기 위해 노력하고 모든 공공기관과 교육기관에서는 영어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스페인어를 사용한 출판물은 강압적인 방법을 통해 통제하기도 하였다. 당시 필리핀 혁명 도중 필리핀인들만의 정부인 제 1공화국을 설립하였는데 미국은 이를 강압적인 방법으로 해산시켰으며 이에 대한 반발은 거셌다. 독립 전쟁으로 사망한 필리핀인만 최소 20만명으로 당시 미국에 대한 반발의 수준을 알 수 있다.[4]

하지만 1929년 미국 대공황을 시작으로 필리핀과 미국의 관계는 변하기 시작한다. 미국 본국의 경제적 상황이 어려워지자 필리핀을 식민국으로서 관리하는 것이 부담이 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1934년 미국 의회에서 타이딩스-맥더피법(Tydings–McDuffie Act)19)이 통과되며 이듬해인 1935년 필리핀 자치정부(Commonwealth of the Philippines)가 발족된다. 필리핀은 미국으로부터 10년의 준비과정을 거쳐 완전한 독립을 약속받게 된다.[4]

이에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박애주의와 자유주의를 표방한 입장을 내새워 필리핀을 독립을 발표하게 되며 필리핀과 미국은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필리핀 친미 정부의 수립 편집

마누엘 로하스
 
경력제 5대 필리핀 대통령(필리핀 제 3공화국 체제의 제 1대 대통령)

필리핀 독립 당시 미국은 본국의 속사정으로 식민 통치를 끝냈지만 결과적으로 약소민족국가에게 자유민주주의를 설파한다는 대의를 내새웠기에 미국에 대한 필리핀의 호의적 감정은 커져가는 상황이었다.미국의 필리핀 독립 선언 이후 필리핀 자치 정부를 책임질 인적자원은 미국 식민 통치 기간간 미국식 교육 방법과 친미적 성향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 계층이었다. 미국이 제공하는 친미주이적 식민 교육아래 정치를 배우고 자국의 미래를 논하던 필리핀 신흥 엘리트 계층들의 통치아래 필리핀은 자연스럽게 미국의존적 성향을 띠게 됐다.[5]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은 필리핀의 통치권을 미국으로부터 빼앗았으며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필리핀은 자원공급을 위한 식민국가로 다시 전락하였다. 필리핀은 미국으로부터 독립을 약속받은 상황이었기에 갑자기 나타난 일본에 대한 반감은 매우컸다. 하지만 초기 필리핀을 상실하였던 미국은 더글라스 맥아더(Douglad MacArthur) 원수 지휘아래 필리핀 탈환에 성공하였고 맥아더는 필리핀의 국가적 영웅이 되었다.[5]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대통령에 이어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대통령은 필리핀의 독립을 다시금 공개적으로 보장하며 필리핀내 미국에 대한 호의적 여론 형성과 친미적 성향의 필리핀 신흥 엘리트 층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1945년 2월 필리핀 미국에 망명해 있던 자치정부가 마닐라로 돌아오자 선거의 필요성이 재기되었고 1945년 12월 미국하원은 필리핀 총선거 일자를 1946년 4월 30일로 정하여 필리핀에 통보하였다.[5]

당시 필리핀 대통령 후보로는 현직 대통령이었던 오스메냐와 마누엘 로하스였다. 하지만 마누엘 로하스는 태평양 전쟁 당시 친일 행동을 한 혐의로 비판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로하스는 오스메냐보다 14년 젊은 나이로 젊고 강한 이미지를 대중들에게 호소하였다. 또한 로하스는 필리핀의 국가적 영웅인 맥아더의 측근이었다. 맥아더의 부관까지 지낸 로하스는 그의 후원으로 미군의 조직력과 라디오 방송망과 같은 인프라를 유세활동에 동원할 수 있었다. 필리핀의 상황은 모든 것이 부서지고 모든 것이 망가진 위기상황이었기 때문에 미국의 원조가 절박했을 뿐더러 미국에 대한 무조건적 신뢰가 여론이던 현실이었다. 따라서 국민들은 자연스럽게 미국과 더욱 가까운 로하스를 선택하였다. 미국의 결정적 도움으로 대통령이 된 로하스와 그 독립정부는 미국이 원하는 것을 내어줘야 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5]

독립 직후 필리핀의 안보 상황 편집

1920년대와 1930년대부터 필리핀 자치정부와 미국으로부터 경계를 받았지만 1920년대 말 이후 공산주의 프로파간다가 빠르게 확산되었다. 후크발라합은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항일 인민군이었다. 당시 미국은 소련과 손을 잡고 전체주의와 파시스트 문제를 해결 중에 있었는데 이에 따라 후크발라합은 공산주의 활동에 세계적 흐름을 따르는 것이라며 정당성을 주장하였으며 일본의 축출을 도우면 필리핀의 독립이 다시 재게 될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공산주의 지도자하에 가장 큰 항일 무장단체가 있다는 것은 미국에게 부담이었으며 큰 위협이었다.[6]

 
후크발라합이 사용한 기

1946년 마누엘 로하스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고 자유당이 필리핀 제 3공화국의 집권당이 되었다. 이들은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후크발라합 청산에 나섰다. 1946년 8월부터 후크발라합, 반란군과 정부군간의 전투가 시작되었고 이는 1948년까지 이어졌다. 당시 동남아시아 전체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격돌하며 혼란기를 맞이하고 있었으며 이에 필리핀은 대외적인 안보 불안 또한 느껴야 했다. 미국의 경제적 지원은 이러한 상황속에서 턱없이 부족하였으며 미국은 지원에도 불구하고 나아지지 않는 필리핀의 상황에 경고성 조언까지 감수하였고 필리핀-미국의 관계는 틀어지고 있었다.[6]

필리핀은 미국의 더 큰 원조를 원했으며 미국과의 관계회복을 위해선 한국 전쟁 참전의 결정을 고려해야 했다.

주요 전투 편집

율동 전투(1951.04.22~04.23) 편집

율동 전투는 필리핀 제10대대전투단이 연천 북방 율동에서 수행한 방어 전투이다. 22일부터 23일까지 중공군 제 34단의 공격을 저지하였으며, 터키여단과 미군부대들의 엄호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7]

상황 편집

1951년 2월말 중공군 제3병단과 제19병단의 공격 기도를 간파한 미 제8군 사령관 밴 플리트 대장은 최대의 타격을 지시함과 동시에 열세에 밀릴 경우 단계적 철수를 지시하였다. 1951년 4월 21일 오전 중공군과 북한군은 공격개시점에 진입하였고 다음날인 22일 늦은 오후 공격을 전개하였다. 이때 중공군 제12군은 제15군과 함께 미 제34단을 섬멸코자 공격 작전을 전개하였다. 당시 연천의 동쪽 방향의 전선 상으로 진출해있던 필리핀대대는 방어 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필리핀대대는 전투에 앞서 22일 주저항선을 인수하기 위해 전곡에서 연천 북방의 율동으로 이동하였다.[7]

전개 편집

상황도 설명
 
  • 4월 22일 필리핀대대 미 제65연대 제 1대대의 주저항선 인수
 
  • 4월 22일 중공군 포대장 생포를 통해 중공군 총공세 날짜가 22일임을 알아냄
  • 4월 22일 20시경 우측의 터키여단 공격
 
  • 후방으로 침투한 중공군에 의해 터키의 사격지휘통신망 마비
  • 중공군 제12군 선두부대 터키군 진지 정면 돌파
 
  • 4월 22일 23시경 중공군 필리핀대대 전 지역으로 확산
  • 중공군 B중대와 특수중대 사이 간격 발견 후 1개 대대 집중 투입
  • 4월 23일 03시경 B중대 다음 능선으로 철수 후 급편진지 편성
 
  • 4월 23일 03시경 특수중대 일부진지 피팔 당함
  • 후방으로 침투한 중공군에 의해 대대지휘소 공격당함
  • C중대 역습 우전방 지역 회복위해 역습 시도
 
  • 4월 23일 09시 철수 명령 하달
  • C중대 역습 포기, 미군 부대, 터키 여단 철수
 
  • 통신 두절로 특수중대 철수 명령 하달 받지 못함
  • 통신 연결 후 철수명령 하달 받은 특수 중대는 전우들의 시체 수습을 위해 다시 전장으로 뛰어듬
  • 시체를 수습한 후 특수중대는 중공군에 포위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진을 돌파하여 철수에 성공

공적[7] 편집

  1. 대대는 전사 12명, 부상 38명 실종 6명의 인명피해가 발생,
  2. 적2명 생포, 500여명 사살 및 부상
  3. 중공군의 주력 부대 저지 후 우인접 부대들의 철수 시간 확보

아스날·에리 고지 전투(1952.06.15~06.21) 편집

 
부산에 도착한 필리핀군

아스날·에리 고지 전투는 필리핀 제19대대전투단이 티본고지 남단의 아스날·에리 고지에서 수행한 방어전투이다. 15일부터 21일까지 중공군 제117사단으로부터 고지를 백병전을 통해 지켜냈다.[8]

상황 편집

당시 휴전회담의 진전이 없고 양국 모두 회담에서 유리한 입장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에 돌입한 상태였다. 6월에 들어 공산군이 포격을 확대하여 주저항선에 대한 견제를 늘리고 있었기 때문에 미 제54사단은 카운터작전을 전개하기 위해 1단계 목표를 점령하였다. 또한 주저항선에 12개의 전초진지를 구축하여야 했기 때문에 목표 8의 에리고지와 목표 12를 점령하고자 하였다.[8]

이에 '사냥개(blood-hound)'라 불리던 필리핀 제19대대 전투단은 1952년 5월 8일 부산 상륙 후 대광리 서북쪽 조밭골로 이동하였다. 6월 15일 필리핀대대는 미 제179연대 제2대대의 진지를 인수하였다. 이들이 인수한 지역은 정면에는 티본(T-Bone)의 능선이 있었으며 이 능선의 끝에는 1개 소대규모의 주둔이 가능한 섬모양의 에리(Eerie)고지가 있었으며, 500m 북쪽으로는 아스날(Arsenal)고지가 있었다.[8]

필리핀 대대는 전방 중앙의 엉클 및 요크 고지에 L중대 1개소대를 배치하였다.[8]

전개 편집

상황도 설명
 
  • 6월 15일 필리핀 대대 미제 179연대 제 2대대 진지 인수
 
  • 6월 18일 진지 교대 후 초기 취약점 활용을 위해 중공군 필리핀대대 전초지지 집중포격
 
  • 6월 19일 밤 중공군의 포격 및 아스날고지, L중대 공격
  • 6월 20일 22시경 중공군의 대구경 포탄 아스날과 에리 전초에 집중(20여분간 계속)
  • 필리핀 대대의 포격지원으로 중공군 철수
 
  • 6월 20일 23시경 중공군 재공격 개시
  • 중공군 좌측의 포크찹 전초에 5000발의 포탄 사격
  • 연대 규모의 중공군 전차 동원하여 L중대의 아스날, 에리 전추를 공격
  • 중공군의 끈질긴 전진으로 백병전 전개
  • 6월 21일 03시 40분경 중공군 철수

공적 편집

미 제 45사단장 러프너 소장은 필리핀대대의 전공을 치하하였으며 대한민국 대통령 또한 부대표창을 수여함

  1. 적 전차 2대 파괴, 65명 사살
  2. 아군 8명 전사, 16명 부상
  3. 2개 연대 규모의 중공간 격퇴 및 전초진지 고수

백석산-크리스마스고지 전투(1953.07.15~07.18)[9] 편집

백석산-크리스마스고지 전투는 필리핀 제144대대전투단이 백석산-크리스마스고지에서 수행한 방어전투이다. 15일부터 18일까지 백석산-크리스마스고지 부근의 공산군 진지를 점령하고 중공군의 역습을 격퇴하였다.

전개 편집

  • 7월 13일: 중공군의 7월 공세 시작, 중공군의 한국군 6개 진지 돌파
  • 7월 15일: 한국군 제 11사단의 중공군 공세 저지 성공
  • 7월 15일 00:05분: 크리스마스 고지 전초에서 1개의 중대 규모 적에게 미 제180연대 공격당함
  • 7월 15일 05:40분: 미 1개 중대 역습 개시, 필리핀 대대의 2개 중대 역습 참가
  • 7월 15일 07:30분: 미 1개 중대 좌측능선 탈취, 필리핀 B중대 미국 중대 지원
  • 7월 15일 11:50분: 크리스마스 고지 목표 점령
  • 계속해서 고지 재탈환을 향한 중공군의 공세가 이어졌지만 필리핀 중대와 미국 중대는 고지를 지켜냄
  • 7월 18일 21:30분: 청음초진지로 수미상의 적 접근 이후 적 1개 중대 관측 후 아군 철수 시킴
  • 7월 18일 21:30분: 적의 최후 저지사격선과 탄막 사격지역으로 접근 확인 후 모든 화력 집중, 적의 계곡 아래로의 후퇴
  • 7월 18일 22:30분: 적의 재공격 그러나 격퇴
  • 7월 19일 23:00시: 소대규모의 적 정찰대 전초로 재침 기도, 25분간의 고전 끝에 적 5명 사망, 10여명 부상 후 후퇴
  • 7월 22일 자정: 적의 필리핀대대 향한 요란사격 및 확성기 설치를 통한 반정 선동, A중대의 야포사격으로 저지
  • 7월 22일 ~ 24일: 적 포격 대대지역 집중(A중대에만 일일 평균 500발)
  • 7월 27일: 휴전 협정문서 서명

결과 편집

본 전투로 인한 희생자 현황은 이러하다.

참전인원(희생자)
구분 장교 사병
전사 1명 4명 5명
실종 및 포로 0명 0명 0명
부상 1명 41명 45명
2명 45명 47명

참전 현황[10] 편집

참전기간 및 인원 편집

  1. 연 참전인원: 7420명
  2. 참전기간: 1950. 9. 19~1955. 5. 13

전사상자 수 편집

  • 전사: 112명
  • 부상: 299명
  • 실종: 57명(이중 41명은 포로교환으로 귀환)

상훈 편집

대통령 부대표창 편집

 
수훈 십자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
대통령 부대표창
부대 국가 및 전투명 표창일
제20대대 한국, T-bone 전투 1952. 6. 11
제19대대 한국, 알세날 및 에리에 전투 1952. 7
제14대대 한국, 사태리 계곡 및 백석산 전투 1953. 12. 6
제10대대 B중대 및 특수중대 필리핀, 율동전투 1951. 9. 5
제14대대 필리핀, 전 참전기간 1954. 3

개인 훈장 편집

 
을지무공훈장
개인 훈장
국별 훈장종류 수량
한국 을지무공훈장 8
충무무공훈장(금성) 4
충무무공훈장(은성) 13
충무무공훈장(무성) 8
필리핀 Medal for Valor 1
Distinguished Conduct Star 6
Distinguished Service Star 1
Gold Cross Medal 14
Bronze Cross Medal 10
Military Merit Medal 159
미국 Distinguished Service Cross 2
Silver Star 8
Legion of Merit 2
Bronze(V) 5
Bronze(M) 58
Air Medal 5

양국 관계 및 참전 기념 사업 편집

1950년대와 1960년대 필리핀과 한국은 동아시아의 반공전선의 주요국가로서 정치적 연대감을 유지하였다. 1966년 마날라에서 개최한 베트남전 참전 7개국간의 정상회의에서 한국과 필리핀은 조우하여 각국의 정치적 관계와 외교적 입장을 확고히 하였으며 협력의 관계를 다졌다. 필리핀의 한국 전쟁에 대한 기여는 아시아에서 태국과 함께 규모적으로나 업적으로나 큰 기여였으며 이는 양국이 깊은 관계로 뿌리내릴 수 있게 한 주요한 양분이 되었다.

16세기 이전 스페인의 필리핀 식민지 건설 이전에는 필리핀은 군도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흩어진 섬들이 뭉쳐 국가의 영향력을 발휘 할 수 없었다. 이후에도 외부와의 지속적인 교류는 있었으나 주위의 태국, 배트남과 같은 대륙지역의 왕국들이 타 지역과 관계를 맺는 수준의 외교적 교류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필리핀은 한국 전쟁이후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협력 구축과 외교 관계형성을 맺기 시작하면서 양국간의 우호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한국에 제공한 도움을 기반으로 외교적 입지를 넓히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한국방문 및 필리핀 방문 프로그램 편집

1975년 편집

한국 재향군인회와 한국관광공사 주도로 파한협회를 초청하였다. 첫 방문에는 레이날도(Reynaldo) 장군, 플로레스(Flores)부부 등이 참석하였고 계속되는 방문 행사에 라모스 장군 부부도 참석하였다.

이에 파한협회도 한국인들을 초청하였는데 주로 재향군인회 인사들을 초청하였으며 스틸웰(Stilwell) 유엔군사령관 또한 초청되었다.[11]

2009년 편집

한국-필리핀 수교 60주년을 기념하여 보훈처와 필리핀대사관이 공동으로 파한협회 및 가족을 초청하였다. 본래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도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진행되지 못하고 행사는 연기 및 축소되어 진행되었다. 첫 행사는 2009년 7월 5일 반포공원에서 열렸다. 필리핀 각 부족들의 고유 의상 소개를 비롯한 민속공연, 한·필리핀의 예술, 무용, 가수들이 참가하여 합동공연을 펼침으로써 행사를 빛냈다.

두 번째 행사는 2009년 9월 19일부터 이틀간 필리핀대사관 주최로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파한필리핀원정군 사진전이 열렸다. 필리핀 원정군이 한국전쟁 기간 동안 활동한 사진이 60점 전시되었다.[11]


파한협회 총회는 1973년 7월 이후 매년 정기적으로 개최되고 있다.[11]

필리핀군 참전 기념비 편집

1974년 10월 2일 한국정부는 필리핀군 참전 기념비를 경기도 고양시 관산동에 건립하였다. 고양은 필리핀군의 주전장이었으며 기념비를 통해 필리핀군 참전의 의의를 살리고 필리핀과 한국사이의 혈맹을 영원히 기리고자 하였다.[12]

기념비에 조각된 50명의 모습과 표정은 절망과 좌절을 딛고 일어난 우리 국민의 자유와 평화를 추국하는 모습이며, 탑신 전면의 부조는 필리핀 고유 민속 문화를 표현한 것이다.[12]

기타 활동[13] 편집

  • 1980년 4월 22일(목) "율동전투의 날" 기념식이 마닐라서 거행하였으며 매년 22일을 "율동전투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 2000년 8월 9일을 "한국참전용사 기념일"로 선정하여 매년 기리고 있다.
  • 2005년 6월 25일 한국 전쟁 55주년을 기념하여 마리키나시의 마리카나 언덕에 "마리코리아 기념탑(Marikorea Monument)" 제막식을 거행했다.

같이 보기 편집

참고 문헌 편집

  • 국가보훈처, 《자유의 수호신, 한국과 필리핀-필리핀군 6·25전쟁 참전사》
  • 육효군, 《필리핀의 한국전쟁 참전 연구》



각주 편집

  1. 국가보훈처,《자유의 수호신, 한국과 필리핀-필리핀군 6·25전쟁 참전사》,68쪽
  2. 손규석·조성훈·김상원,  《6·25 전쟁과 UN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3. 육효군,《필리핀의 한국전쟁 참전 연구》,12~16쪽
  4. 육효군,《필리핀의 한국전쟁 참전 연구》,18~27쪽
  5. 육효군,《필리핀의 한국전쟁 참전 연구》,27~32쪽
  6. 육효군,《필리핀의 한국전쟁 참전 연구》,33~37쪽
  7. 손규석·조성훈·김상원,  《6·25 전쟁과 UN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270~274쪽
  8. 손규석·조성훈·김상원,  《6·25 전쟁과 UN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274~277쪽
  9. 국가보훈처, 《자유의 수호신, 한국과 필리핀-필리핀군 6·25전쟁 참전사》,134쪽~138쪽
  10. 국가보훈처,《자유의 수호신, 한국과 필리핀-필리핀군 6·25전쟁 참전사》,228쪽
  11. 국가보훈처,《자유의 수호신, 한국과 필리핀-필리핀군 6·25전쟁 참전사》,147~148쪽
  12. 국가보훈처,《자유의 수호신, 한국과 필리핀-필리핀군 6·25전쟁 참전사》, 148~150쪽
  13. 국가보훈처, 《자유의 수호신, 한국과 필리핀-필리핀군 6·25전쟁 참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