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쓰라기노 소쓰히코
가쓰라기노 소쓰히코(일본어:
출전편집
《일본서기》에는 진구 황후, 제15대 오진 천황, 제16대 닌토쿠 천황의 3대에 걸쳐 카츠라기노 소츠히코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1]
- 진구 5년(서기 205년) 음력 3월 7일
- 진구 62년(서기 262년)
- 신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아 소츠히코가 신라 토벌군으로 파견되었다. 이어 백제삼서 중 하나인 《백제기》를 인용한 내용에 따르면, 임오년에(서기 382년) 소츠히코가 신라의 미인계에 넘어가 신라가 아닌 가야를 공격했다. 가야 왕 기본한기가 백제로 도망친 뒤 천황에게 직소하니 천황은 노하여 목라근자를 보내 소츠히코를 공격하게 했다.[2] 소츠히코는 천황이 노한 것을 알고 비밀리에 귀국해 잠적했다. ‘일설에 따르면’, 소츠히코의 여동생이 황궁을 섬기고 있었기에 여동생을 통해 천황의 분노가 풀렸는지 여부를 알아보았지만 화가 풀릴 기미가 없다고 하자 석굴에 들어가 자살했다.[3]
- 오진 14년(서기 283년)
- 백제에서 궁월군이 와 천황을 배알하여, 백제 백성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와 귀화하고 싶지만 신라가 방해를 해 바다를 건널 수 없다고 고했다. 천황이 궁월군의 백성들을 맞아오기 위해 소츠히코에게 군사를 맡겨 보냈지만 소츠히코는 3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 오진 16년(서기 285년) 음력 8월
- 닌토쿠 41년(서기 353년) 음력 3월
《고사기》에서는 갈성장강회증도비고(葛城長江曾都毘古), 갈성지증도비고(葛城之曾都毘古)라는 다른 이름표기만 언급될 뿐, 특정 사건에 등장하지는 않는다.
《만엽집》 제11권 2639번 시에 언급된다. “카츠라기노 소츠히코가 사용한 신목(新木) 강궁처럼 나를 당신이 아내로 의지하므로 내 이름을 말할 수 있다”는 내용인데, 고대 일본 관습에서 연인의 이름은 두 사람의 관계가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전에는 서로 발설하지 않는 것이었으므로 이름을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된, 즉 남자와 확실하게 맺어진 여자가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내용으로 풀이된다.[4][5]
해석편집
《일본서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한 사람이 거의 15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활동한 비현실적인 내용이 되지만, 다른 나라의 사료와 교차검증하고 이주갑인상에 따라 연대를 보정함으로써 실재성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첫 번째 기록은 박제상의 미사흔 탈출 이야기인데, 이 사건은 삼국사기에서는 서기 418년이고 삼국유사에서는 서기 425년으로 한국 쪽 사료에 따르면 5세기에 일어난 일이다.
두 번째 기록은 이주갑인상에 따라 2갑자 내리면 서기 382년이 된다.[6]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오진 시기 기록도 2갑자 내리면 서기 403년-서기 405년이 된다.
닌토쿠 천황은 중국 사료의 왜5왕으로 그 실재가 인정되는데, 중국 쪽 기록에는 460년-462년 사이에 닌토쿠에서 한제이로 또는 리추에서 닌토쿠로의 왕위 계승이 이루어졌다. 때문에 이것과 대조하여 다섯 번째 기록은 1갑자만 내리면 서기 413년이 된다.
정리하면
- 서기 382년 - 백제를 도와 신라를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신라의 미인계에 넘어가 가야를 공격
- 서기 403년 - 일본으로 이주하고자 하는 백제인들을 호위하기 위해 한반도로 파견되었으나 3년간 연락 두절
- 서기 405년 - 헤구리, 이쿠하가 이끄는 지원병 덕분에 일본으로 귀환
- 서기 418년 또는 425년 - 박제상에게 속아 미사흔을 놓침
으로 대략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걸쳐 활동한 인물로 비정될 수 있다.
가계편집
- 부친: 다케노우치노 스쿠네(武内宿禰)
- 모친: 葛城国造荒田彦女葛比賣
- 자녀: 葦田宿禰, 玉田宿禰, 이와노히메노미코토(磐之媛 또는 仁徳后), 的戸田宿禰(的(いくは)氏祖), 腰裾宿禰(忍坂氏祖), 熊道宿禰(忍海原氏・朝野氏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