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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봉(姜錫奉, 1890년 9월 23일 ~ 1956년 10월 14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로서, 항일무장기독교 비밀단체인 조선국민회 결성을 주도하였고, 1919년 4월 8일 목포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1]

강석봉
1936년(47세)경의 강석봉
출생1890년 9월 23일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전라남도 목포시
사망1956년 10월 14일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전라남도 무안군 일로읍 청호리
매장지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
직업한국의 독립운동가, 조선국민회 활동, 목포의 4·8 만세운동 주도
종교기독교
배우자오석경
자녀(아들)종천, 종수, 종산 (딸) 복순 소순, 은순,청자, 금랑 (손자) 경수, 정훈 (손녀) 해선 해령
친척조카 한규철[2]

생애편집

전남 목포(木浦)사람으로, 1905년(15세?) 경 부친 강영숙을[3] 따라 하와이로 이주하여[4] 박용만(朴容萬), 이승만(李承晩) 등이 하와이로 오기전에 하와이 협성협회(1907.9)등에서 활약하다가 1909년부터는 하와이국민회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국에서[5] 활약하다가, 1909년 귀국하여 항일무장기독교단체인 조선국민회목포4.8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6] 1909(?)년 귀국하여서는,[7]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서 발행하는 <신한국보(新韓國報)>를 국내로 들여와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4년 하외이에서 박용만의 무장독립운동단체의 결성 지시를 받고 귀국한 장일환(張日煥)과 국내 기독교계의 서광조(徐光朝) 등과 함께 평양에서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간도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할 계획 등을 추진하였다.

1915년 3월 장일환(張日煥), 배민수(裵敏洙)·김형직(金亨稷)·백세빈(白世彬)·이보식(李輔植), 숭실대학 학생 등과 조선국민회(회장 장일환)를[8] 조직하고 전라도구역장의 임무를 맡았으며, 간도(間島)에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추진하던 중 이듬해 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8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배민수,[9]) 김형직[10]등과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11] 조선국민회는 비밀결사조직으로서 권총을 '돼지다리' 등의 암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12] 1918년 출옥 후 그는 기독교의 기반이 닦여진 목포로 귀향하여 동지 서상봉(徐相鳳)·배치문(裵致文)·곽우영(郭宇英)·서화일(徐化一)·박여성(朴汝成)·박복영(朴福永)·양병진(楊炳震) 등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과 만세운동 등을 계획하였다.

귀향 후 그는 목포의 기독교계 정명여학교에서 강호연이라는 이름의 한문교사로[13] 활동하며 독립의지를 학생들에게 전파하다가, 1919년 4월 8일의 독립만세운동을 위해서 양동교회 집사이던 서기건 등과 정명여학교가 참여하는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실행하였다. 정명여학교 학생들은 새벽부터 태극기와 선언서를 투입하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커다란 플래카드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였다. 4월 8일 독립만세운동을 위해서 남궁혁박상렬 형제 등도 적극 준비하고 있었는데 박상렬은 상업학교 학생들의 시위를 주도하기로 하였다. 참여한 학교는 정명여학교 외에도 영흥학교, 목포공립보통학교, 목포간이상업학교 등이었다. 이 시위로 서기건, 박상렬 등 80여 명이 체포되어 약 40명이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옥고치루었는데, 강석봉은 피신하여 궐석재판에서 2년형을 선고받았는데 당시 4.8독립만세 운동 주모자 중 가장 무거운 형량이었다.

4년간 피신하던 그는 1923년 1월 대구(大邱)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14] 목포로 압송되어 1923년 2월 12일 소위 보안법·출판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15] 해방될 때까지 현 신안군인 선도에 연금되어 있었다고 전한다.[16] 해방 후는 무안군 일로면 청호리에서 여생을 마쳤고, 묘지는 청호리에 있다가, 1995년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으로 옮겼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1986년에는 대통령 표창,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높여 추서받았다.

각주편집

  1. 광주에서 공산당 활동을 한 동명이인의 1898년생의 "강석봉"(姜錫奉)도 있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설명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강석봉이 1916년 대한인국민회 지부 활동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목포출신 강석봉과 혼돈한 기술이다. 반대로 1927년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에 가입되어, 1927년 8월에는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된 강석봉은 공산당 활동을 한 강석봉이었다.(한규철)
  2. 보훈공적 최초 자료조사자(포상신청은 사위 이동춘의 도움을 받아 딸 강복순이 함)이자 위키백과 최초 편집자로서 강석봉은 한규철의 어머니 강나무의 큰 오빠가 되어 강석봉은 한규철의 외삼촌이다. 불명확한 부분은 가족구전 중심으로 작성하였다.“한규철홈페이지“
  3. 비문에 의하면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 행좌승지(行左承旨 호조) 겸경연참찬(兼經筵參贊 의정부 정2품)을 하였던 분으로 개국 545년 1936년 사망하였다. 부인은 경주이씨 이문순(李文順). 비석과 묘지는 일로면 청호리에 있다가 손자에 의해 전남 구례군으로 옮겨졌다. 그는 부산 수정동에서 1897년 목포개항 전후로 아들 강석봉을 데리고 목포시 죽동으로 이주하였다고 본다. 평양지방법원 판결문 요약(원본없음)에는 강석봉은 부산 수정동(일부 영주동)출생이고, 주소와 본적은 목포시 죽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국가기록원 독립운동관련 수형인명부).
  4. 기록과 증언이 없어 하와이 이민연대가 불명확하다. 하와이 이민이 1902년부터 1905년사이에 감리교인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고, 제물포를 본사로 부산, 목포, 진남포 등 서부지방 등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아 이 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이주목적은 권유자의 신세계에 대한 설득과 생활고 타개, 신세계에 대한 동경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의 정3품의 관직에 있던 부친과 하와이로 간 이유 등은 단순한 생활고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부자지간만 이주하고 3남 5녀 및 4자매 등 가족은 목포에 있으면서 어머니 이문순이 선창가에서 상업활동으로 생활을 하였다. 하와이에서의 수학정도에 대한 기록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 이만열, 하와이이민과 한국교회(한국교회와 역사16, 2002), * 공정자, 구한말 하와이 이민자의 이민 전 거주지 연구(교육문화연구9, 2003).(한규철)
  5. 하와이에서의 활동은 조사미비 내지 자료부족으로 알 수 없으나 귀국후의 활동과 전언으로 미루어 보아 하와이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하와이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약하다(1907년 하와이 여러 독립운동단체가 하와이 한인협성협회로 결합). 1909년부터는 하와이 한인협성협회와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1905.4)가 연합하여 대한인국민회가 탄생하여, 하와이 한인 협성협회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국이 되었다. 그가 하와이 독립운동 단체에서 회장도 하였다는 전언이 있는데, 하와이협성협회의 회장이든 그 이전 어떤 하와이독립운동단체의 회장이 아니었던가 한다. 귀국때까지는 하와이로 와서 활동하기 시작한 박용만, 이승만이 주도한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국하와이국민회에서도 같은 활동을 하였다고 보여진다.(한규철)
  6. 일제의 불령선인 관련 보고에 의해 그가 전하와이국민회원(元布哇國民會員姜錫)이었다고 하고 메이지 42년(1909) 귀국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하와이협성협회에서의 활동은 거의 확실하고, 하와이국민회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불명확하다. 그러나 조선국민회 결성과정에서 회장이 된 장일환이 제일 먼저 강석봉을 찾아 조적결성을 모의하였던 것은 박용만계의 하와이국민회가 매개가 되어 활동하였다고 여겨진다.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ノ部(1918) 참조(한규철)
  7. 귀국연대에 대해 일제의 불령선인 관련 보고는 메이지 42년(1909) 귀국하였다고 한다.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ノ部(1918) 참조) 그러나 강석봉의 진술에 의해 작성되었을 이 내용은 장일환 등과의 관련성을 적게 하기 위한 진술일 수도 있어 정확한 귀국연대인지는 불확실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다른 하와이 이주민들과 달리 하와이 생활을 정리하고 부친과 귀국한 사정은 모르나 하와이로 함께 가지 않았던 어머니가 상업활동을 통해 목포에서의 생활도 부유해지고 해서 귀국을 종용하였거나, 독립운동을 위해 아버지를 설득하여 귀국하였다고 여겨진다. 어머니는 상업활동을 크게 번성시켜 무안군 일로면 청호리에 경작지도 많이 구입하고 부유하게 되었고 강석봉의 독립운동과 옥바라지 등을 뒷받침하다가 가문이 쇠락하였다고 한다.(한규철)
  8.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최초였던 기독교 무장항일단체였다.
  9. 아버지 배창근은 의병 활동에 참가했다가 1908년 여름 일경에 체포돼 청안 감독에 수감됐고, 1908년 8월 서대문교도소에서 순사했다. 그는 평양 숭실중학교에 다녔고, 당시 장대재교회에 다녔다. 『배민수자서전』(연세대출판부 편, 1999) 참조
  10. 김일성주석의 아버지. 1918년 출옥한 뒤 조국광복회를 조직하고, 중강진으로 피신하여 지역 3ㆍ1만세운동을 지도하였다. 1925년 1월 경찰에 체포된 후 중국 지린성 푸송(撫松)현에서 정의부(正義府)계 백산무사단(白山武士團)과 연계ㆍ활동하다 1926년 6월 5일에 공산주의 집단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평양시 대동군에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 근교에 안장되었다.
  11. 재판기록은 없고 수형인명부, 집행원부, 형사사건부만 국가기록원에 남아 있다. 배민수의 자서전에는 강석봉과 함께 했던 감방생활에서의 에피소드도 기록되어 있다
  12. 姜德相 編, 『現代史資料』25卷, 東京: みすず書房, 1967, 35~37쪽.
  13. 출옥 후 그는 감시를 피하기 위해 강호연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던 것 같다.(정명100년사) 그는 정명여학교 만세운동과정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였는데, 이 때의 한문교사가 곽우영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14. 어느 여인과 함께 대구에서 피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15. 출옥 후 그가 1927년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에 가입되어, 1927년 8월에는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였다고도 하나(보훈처 공훈록), 이 때의 강석봉은 광주에서 공산당 활동을 한 강석봉이었다고 본다. 1927년 8월 14일 2면(한규철)
  16. 딸 강복순이 전하기로 자유의사가 아닌 상태에서 선도에 있었다고 하나, 연금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섬 생활시에도 눈을 피해 일로면 청호에도 들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참고자료편집

  • 동아일보, 1923년 1월 29일 3면, 목포만세수모자(木浦萬歲首謀者),
  • 동아일보, 1927년 8월 14일 2면, 조선청총개혁 위원전부신임(朝鮮靑總改革 委員全部新任)
  • 동아일보사, 『3·1운동 50주년 기념논문집』, 1969
  • 姜德相 編, 『現代史資料』25卷, 東京: みすず書房, 1967, 35~37쪽.
  • 국사편찬위원회 편,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8권, 1966, 518쪽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민족독립운동사』3권, 1988, 556·610쪽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민족독립운동사』9권, 1991, 287쪽
  • 일본외무성기록, 秘密結社發見處分ノ件,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ノ部 在內地 二, 1918.2.2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
  • 강영심, 「조선국민회연구」『한국독립운동사연구』3, 1989
  • 연세대출판부 편, 『배민수자서전』, 1999
  • 방기중, 『배민수의 농촌운동과 기독교 사상』, 연세대출판부, 1999.
  • 정명여자중·고등학교 100년사 편찬위원회 편, 『貞明 100年史 : 1903-2003』, 2003
  •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