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창업(桂昌嶪, 일본식 이름: 桂昌嶪, 1916년 4월 27일[1] ~ 1999년 8월 3일)은 일제강점기대한민국의 법조인이다. 본관은 수안이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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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선천군 출신이며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했다. 홍진기와 경성제대 동창이다. 1939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뒤 평양지방법원 사법관시보, 해주지방법원 판사를 지내는 등 조선총독부 소속 판사로 근무했다.

대한민국에서는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제1공화국 말기인 1959년대한민국의 대법관으로 임명되어 1961년까지 약 2년 동안 재직했다. 1961년 4월, 3·15 부정선거의 책임자로 최인규가 사형 선고를 받은 재판의 재판장이었다.

1970년에는 새로 창설되어 책, 잡지 및 주간신문에 게재된 기사와 광고내용에 대한 검열을 시작한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초대 회장을 맡았다.[2] 1997년에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으로 선정된 바 있다.[3]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사법 부문에 포함되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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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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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계창업”. 엠파스 인물정보. 2008년 4월 18일에 확인함. 
  2.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韓國刊行物倫理委員會]”. 엠파스 백과사전. 2008년 4월 18일에 확인함. 
  3. “[인물동정] 정세영(고대교유회장)/이석희(대우재팬외장)”. 한국경제. 1997년 5월 26일. 2008년 6월 4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