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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부정선거 또는 3·15 개표조작1960년 3월 15일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해 실시된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대한민국 제5대 부통령 선거를 말한다.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 (무효)

1956 ←
1960년 3월 15일
→ 1960.8

투표율 97.0%
  Rhee Syng-Man in 1956.jpg


후보 이승만
정당 자유당
득표수 9,633,376
득표율 86.0%

1956 South Korean election result map.png

광역시·도별 우세 지역
이승만

선거전 대통령

이승만
자유당

대통령 당선자

이승만
자유당

대한민국
제5대 부통령 선거

1956 ←
1960년 3월 15일

투표율 97.0%
  Lee gi bung.png Chang Myon 194804'.png
후보 이기붕 장면
정당 자유당 민주당
득표수 8,337,059 1,843,758
득표율 79.2% 17.5%

선거전 부통령

장면
민주당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
자유당

이때 대통령 선거는 후보로 등록한 두 명 중 한 명이 선거 전에 사망해 사상 최초로 한 명의 후보에 대한 선거로 치러졌고, "대통령 또는 부통령의 후보자가 1인인 때에는 그 득표수가 선거인총삭(선거인명부에 기재된 선거권자의 총수)의 3분지 1이상에 달하여야 당선인으로 결정한다"는 선거법 규정에 따라 선거권자의 3분의 1 이상을 득표한 이승만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부통령 선거에서는 이기붕 후보가 79.2%의 득표율로 제5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이 선거는 부정선거로 밝혀졌다.

부정 선거가 폭로되자 각지에서 부정선거에 반대하는 항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부정선거를 시위하던 학생들 중 김주열 군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화장된 유골이 마산 앞바다에 유기되면서 후일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학생 데모대와의 대화를 통해 이기붕 부통령 부정선거에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한 후 즉각 하야하였다.

목차

후보편집

대통령 선거에는 이승만 자유당 후보와 조병옥 민주당 후보 등 2인만이 입후보하였다. 그 외에도 출마를 시도한 정당 및 후보자가 있었으나, 자유당 측에서 공권력과 정치 깡패를 동원해 대대적인 입후보 방해를 자행해 모두 무산되었다.[1][2]

부통령 선거에는 이기붕 자유당 후보, 장면 민주당 후보 외에 김준연 통일당 후보, 임영신 대한여자국민당 후보도 입후보하여 4인의 후보가 나오게 되었다.

자유당편집

자유당은 이승만의 4선 공작을 펼치는 한편, 80대 노인인 이승만 대통령의 서거 시 대통령에 취임하게 돼있는 부통령 자리를 다시 한 번 노리기 위해 이기붕 추대 공작도 병행하였다. 자유당은 1959년 6월 29일 이승만·이기붕 진용을 재구축하였고 서둘러 출마를 강행하였다.

그러나 김준연 통일당 부통령 후보, 임영신 대한여자국민당 부통령 후보 등이 대통령으론 이승만을 지지한다면서 부통령 선거전에 뛰어들어, 이승만 지지 표가 갈려서 패했던 4년 전 부통령 선거 때의 상황이 재현될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돌게 되었다.

자유당 제4대 대통령·제5대 부통령 후보
대통령 후보
이승만
부통령 후보
이기붕
제1·2·3대 대통령
제헌 국회의장
제헌 국회의원
제3대 전·후반기·제4대 전반기 민의원의장
제3대 국방부 장관
제3·4대 서울특별시장
제3·4대 민의원의원

민주당편집

민주당은 지난 부통령 선거민의원의원 선거에서의 연이은 선전으로 자유당을 강력하게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 내부에서는 신파와 구파 간의 갈등이 날이 갈수록 심화돼 후보 결정도 하게 어려운 상황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민주당은 1959년 11월 26일 정·부통령후보 지명대회를 열고 구파의 조병옥 박사를 대통령, 신파의 장면 박사를 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조병옥은 선거를 한 달 가량 앞둔 1960년 2월 15일 지병으로 미국에서 요양하던 도중에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이승만은 단독후보가 되었다. 지난 대선 때 신익희가 유세 중 사망하였던 것에 이어 민주당은 두번째로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대선 후보를 잃게 되었다.

민주당 제4대 대통령·제5대 부통령 후보
대통령 후보
조병옥
부통령 후보
장면
제5대 내무부 장관
제3·4대 민의원의원
초대 경무부장
제4대 부통령
제2대 국무총리
제헌 국회의원
초대 주미 대사

민족주의민주사회당편집

노농당은 1959년 12월 20일 대의원 420명 중 25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전당대회에서 당명을 민족주의민주사회당으로 개칭하고 전진한을 대통령, 이훈구를 부통령에 지명했다. 그러나 자유당의 공권력을 동원한 입후보 방해 공작 때문에 애를 먹었으며, 선관위가 당명 변경이 법적으로 하자가 있다며 민사당 당적자로서의 후보 등록을 받아주지 않는 등 어려움에 부딪힌 민사당은 결국 입후보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민족주의민주사회당 제4대 대통령·제5대 부통령 후보
대통령 후보
전진한
부통령 후보
이훈구
초대 사회부 장관
제1·2·3대 민의원의원
제헌 국회의원

반독재민주수호연맹편집

반독련은 1960년 2월 8일 각파 대표자 회의를 열고 장택상을 대통령, 박기출을 부통령에 지명했다. 그러나 후보 등록 서류를 3번이나 길거리에서 괴한들에게 빼앗기고, 깡패들이 장택상의 집안까지 침입해 협박을 하는 등 치열한 입후보 방해 공작이 벌어졌고, 장택상은 이에 본인의 입후보가 좌절될 시 야당의 조병옥 후보를 지원할 것이라며 여당에게 후보 등록 방해 공작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천신만고 끝에 두 후보는 후보 등록 마감일인 2월 13일 밤 후보 등록 서류를 제출했으나, 서류 미비를 이유로 각하되어 끝내 입후보에 실패하였다.

반독재민주수호연맹 제4대 대통령·제5대 부통령 후보
대통령 후보
장택상
부통령 후보
박기출
제2대 전반기 국회부의장
제3대 국무총리
초대 외무부 장관
제2·3·4대 민의원의원
초대 진보당 부위원장

기타편집

그 외에도 민혁당 소속의 서상일 후보, 진보당 부당수 출신의 김달호 무소속 후보도 대통령 후보 출마를 하려 했으나 끝내 포기했으며, 한기도 무소속 후보 역시 대통령 후보 등록 서류를 제출했음에도 법정 요건 미비를 이유로 등록이 거부되었다.

선거 운동 기간편집

부정 선거 계획편집

 
선거 벽보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은 불리한 조건에 놓여있었다. 전쟁 이후 미국의 무상 원조가 줄어 민생고가 심해진데다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자유당은 국민들의 지지를 잃고 있었다. 게다가 두 차례에 걸친 무리한 개헌으로 인해 민주주의와 헌법을 파괴하는 당이라는 낙인이 찍혀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당이기붕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내무부 관료들과 이정재, 임화수 등 정치 폭력배들을 동원하여 부정 선거와 개표 조작을 감행하였다.

자유당은 전국의 공무원과 경찰 등 공권력은 물론 정치 깡패, 완장 부대까지 동원해 야당의 선거 운동을 방해하고 주민들에게 이승만과 이기붕을 지지하도록 압박하였다.[3][4] 자유당은 또한 야당 참관인들을 갖은 핑계로 투표장에서 끌어내었으며, 투표자들을 3인 1조로 투표하게 하고 투표지를 투표함에 넣기 전에 자유당 측 참관인에게 보여주도록 하는 공개 투표를 시행했다. 유권자들에게 투표 방법을 교육하는데 쓰겠다는 핑계로 가짜 투표용지를 만들어두었다가 투표함에 무더기로 투입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 모든 공작에는 경찰이 가담하고 있었다. 이에 야당과 몇몇 유권자들이 경찰이 수사는커녕 오히려 폭력을 조장하고 있다며 호소하였지만, 자유당은 정치 깡패들로 하여금 폭력 소동을 일으키게 해 이들을 탄압했다. 이런 상황 속에 3월 9일과 10일 전라남도 여수광산에서 각각 민주당 간부가 구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를 계기로 민주당은 부정선거 거부 운동을 전개하였다.[5]

선거일편집

 
선거함 모형

선거일이 가까워지자 이들은 위에서 짠 계획들을 적용하기로 했다. 선거 전날인 3월 14일 자유당은 모든 선거함에 이승만과 이기붕이 찍혀 있는 위조 투표지를 무더기로 집어넣었다.

3월 15일 드디어 선거가 치러졌다. 이들은 투표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가 하면, 한 명 당 투표 용지를 20장까지 가져가는 등의 선거 조작 행위를 저질렀다. 또한 자유당 당원들이 기표소까지 들어가 자유당을 뽑는 지 아니면 야당을 뽑는지 감시하는가 하면 야당 선거 관리인을 투표소에서 쫓아내는 행위까지 저질렀다.[6] 이러한 부정 행위에는 자유당 소속 정치깡패들이 동원되었고 그 밖에도 내무부 소속의 공무원들까지 조직적으로 개입하였다(이 일로 내무부의 차관급과 실국장급 간부들이 구속되었고, 내무부 장관 최인규는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민주당은 오후 4시 30분에 언론에 담화를 발표하였으며, "3·15 선거는 선거가 아니라 선거의 이름 하에 이루어진 국민주권에 대한 포악한 강도 행위"라고 규정하고 불법, 무효임을 선언했다.[6] 이에 부정선거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날 오후 늦게 각지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발생하였다.

한편 선거가 종료된 뒤 개표를 시작했다. 그런데 개표 중 자유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득표율이 100%에 육박하는 결과가 나오자 국무위원들은 자유당 후보가 95% 또는 97%를 넘어 갈 것을 우려하였고, 이렇게 되면 부정선거임이 들통 날까봐 "걱정"을 하였다.[7] 그러자 최인규·이강학 등은 경비전화를 통해 "이승만은 80%로, 이기붕은 70~75% 선으로 조정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각 지에서는 감표에 들어갔으나, 일부 지방에서는 최병환 내무부 지방국장이 50%선 조정을 지시해 혼란을 빚기도 하였다.[8] 하지만 이러한 혼란에도, 이기붕의 표는 79%로 하향 조정하게 되었다.[9]

 
27일동안 행방불명이었던,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중앙부두에서 발견된 김주열
 
1960년 3월 15일자 동아일보. 3.15 부정선거를 다룬 기사.

선거 결과편집

제4대 대통령 선거 당시 총 유권자 수는 11,196,490명으로, 당선에 필요한 최소 득표수는 그 1/3인 3,732,164표였다. 유일 후보인 이승만 박사는 이를 너끈히 넘는 득표를 해 대통령 당선자로 확정되었다. 부통령 선거에서는 4년 전에 46.4%의 득표율을 기록했던 민주당의 장면 후보는 17.5%로 뚝 떨어지고 자유당의 이기붕 후보는 79.2%의 기록적 상승세를 보여서 당선에 성공했다.

대통령 선거편집

득표순위 기호 이름 정당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2 이승만 자유당 9,633,376 86.0%  
- 무효 1,228,896 11.0%
- 기권 334,218 3.0%
선거인 수 11,196,490
총투표수 10,862,272
투표율 97%

지역별 결과편집

지역 이승만 무효 기권
서울 684,146 66.0 264,193 25.5 87,577 8.5 1,035,916
경기 1,139,927 84.9 168,401 12.5 34,990 2.6 1,343,318
강원 829,131 94.0 44,665 5.1 7,902 0.9 881,698
충북 510,369 86.2 66,068 11.2 15,855 2.7 592,292
충남 988,180 90.7 68,952 6.3 32,755 3.0 1,089,887
전북 919,529 87.8 113,640 10.8 14,619 1.4 1,047,788
전남 1,398,887 92.0 108,902 7.2 12,802 0.8 1,520,591
경북 1,403,461 83.9 203,105 12.1 66,956 4.0 1,673,522
경남 1,632,159 86.7 190,158 10.1 60,249 3.2 1,882,566
제주 127,587 99.0 812 0.6 513 0.4 128,912
합계 9,633,376 86.0 1,228,896 11.0 334,218 3.0 11,196,490

부통령 선거편집

득표순위 기호 이름 정당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1 이기붕 자유당 8,337,059 79.2%  
3 2 김준연 통일당 249,095 2.4%
4 3 임영신 대한여자국민당 97,533 0.9%
2 4 장면 민주당 1,843,758 17.5%
선거인 수 11,196,490
총투표수 10,527,445
투표율 94%

지역별 결과편집

지역 이기붕 장면 김준연 임영신
서울 509,693 55.3 378,399 41.1 20,154 2.2 12,704 1.4 920,950
경기 955,804 75.6 278,686 22.1 20,372 1.6 8,771 0.7 1,263,633
강원 786,595 91.6 64,743 7.5 5,468 0.6 1,543 0.2 858,349
충북 437,883 78.6 98,583 17.7 15,196 2.7 5,165 0.9 556,827
충남 884,856 84.7 140,567 13.5 12,488 1.2 6,327 0.6 1,044,238
전북 851,878 85.5 89,846 9.0 32,176 3.2 22,799 2.3 996,699
전남 1,218,247 83.8 140,664 9.7 80,491 5.5 13,612 0.9 1,453,014
경북 1,166.341 75.5 340,214 22.0 27,759 1.8 11,286 0.7 1,545,600
경남 1,398,637 79.5 311,320 17.7 34,869 2.0 15,284 0.9 1,760,110
제주 127,125 99.3 736 0.6 122 0.1 42 0.0 128,025
합계 8,337,059 79.2 1,843,758 17.5 249,095 2.4 97,533 0.9 10,527,445

무효편집

국회는 3월 18일 이승만과 이기붕을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 당선자로 발표하였으나, 부정 선거에 대한 야권과 국민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6일 대국민 담화에서 제4대 대통령 선거 및 제5대 대통령 선거를 다시 치를 것을 밝혔다. 같은 날 국회에서도 3·15 선거를 무효로 하고 다시 치를 것을 골자로 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결국 다음날인 27일 대통령 당선자인 이승만은 사퇴하고, 5월 3일 국회에서 사퇴서를 정식으로 수리하면서 제4대 대통령의 재선거가 확정됐으며, 28일에는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가 사망함으로써 제5대 부통령 역시 재선거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대법원에 제기돼있던 선거 무효 소송은 소송 대상이 둘 다 없어졌고 어차피 재선거가 확정된 터라 진행되지 않았다.

본디 대통령과 부통령의 재선거는 재선거 사유 확정 이후 40일 이내로 시행돼야 했으므로 제5대 부통령의 재선거는 6월 7일, 제4대 대통령의 재선거는 12일까지 실시돼야 했으나, 5월 2일 국회에서 개헌 뒤까지 정·부통령 재선거 보류가 만장일치로 결의되고 재선거 공고권자인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이 국회의 의사를 존중할 것을 표명하면서 재선거는 치러지지 않았다. 1960년 6월 15일 제2공화국 헌법이 시행되며 제1공화국의 대통령과 부통령의 직위는 없어져 재선거를 치르지 않아도 되게 되었고, 대신 제2공화국의 헌법 하에 새로이 제4대 대통령 선거를 국회 간접 선거로 실시해 윤보선이 당선되게 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2019년 5월 5일에 확인함. 
  2.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2019년 5월 21일에 확인함. 
  3. “야당계 자치단체장에 압력”. 《경향신문》. 1959년 1월 17일. 2019년 5월 20일에 확인함. 
  4. 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81, 743
  5. 한국혁명재판사편찬위원회편, 1962[1], 121쪽. 2차 출처 : 한국민주화운동사 1편 111p 인용
  6. 이에 민주당은~: 유숙란, 〈선거의 권위주의적 운용과 역기능〉, 한배호 편, 《한국현대정치론 I:제1공화국의 국가형성, 정치과정, 정책》(나남, 1990), 387쪽.
  7. 학민사 편집부 편, 1985,70~71쪽. 2차 출처 : 한국민주화운동사 1편 113p 인용
  8. 한국민주화운동사 1편 113p
  9. 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 역사 (전면 개정판)》(경세원, 2004), 590쪽. ISBN 89-8341-05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