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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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주의(孤立主義, 영어: isolationism)는 국제정세가 자국의 경제나 안보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 경우, 국제분쟁에서 중립적인 위치를 유지하며 정치, 군사적으로 국제사회에서 고립한다는 정책이다. 이 정책은 미국에서 주로 쓰였다.
이 정책의 장점은 국제분쟁이 발생할 경우 그 국가는 전쟁의 위협에서 비교적 자유롭다는 것이며, 단점은 국제무대에서 강대국으로서 역할 수행을 포기하며 자국에 불리한 정세의 형성을 예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종종 혼동되지만 고율의 관세를 동반하는 보호무역과는 무관하다. 실제로 많은 고립주의자들은 자유무역을 지지하고 있다.
미국의 고립주의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이임사에서 시작되었다. 이임사에서 워싱턴은 미국은 유럽의 어떠한 국가와도 관계를 맺으면 안되며 유럽의 분쟁에 휘말리면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그 이후 약 백여년 동안 미국은 먼로 독트린 등을 통해 고립주의를 더욱 강화하였다. 이 고립주의는 맥킨리의 쿠바·필리핀 침공과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곤봉정책에 의해 변화하는 듯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미국은 대체로 고립주의를 유지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을 때, 대다수의 미국인은 미국이 중립을 유지해야한다 생각하였다. 하지만 루시타니아호사건과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등으로 인한 선박 손실로 미국인의 감정은 연합군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였고, 결국 짐머만 전보 사건으로 미국은 대독 선전포고를 심각히 고려하게 되었다. 그 이후 세 척의 미국 선박이 더 침몰하자, 미국은 지난 120년 동안의 고립주의를 포기하고 연합군쪽에 참전하게 되었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윌슨이 고안한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않고 다시 고립주의 정책으로 돌아섰다. 1930년대의 대공황은 미국의 고립주의를 강화시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미국은 네 차례에 걸친 중립법안의 통과 등으로 가능한 한 유럽의 사태에서 발을 떼려 하였다.
하지만 나치 독일의 잇달은 승리는 미국으로 하여금 경계를 하게 하였고 1940년에는 무기대여법을 제정하여 연합군의 전쟁 노력을 지원하였다. 1941년 12월의 진주만 사건은 미국이 연합군으로 참전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연합군이 승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은 미국의 고립주의 정책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벌어진 냉전은 미국이 세계 곳곳에 군사를 파견하게 하게끔 하였고, 냉전이 끝난 후엔 "팍스 아메리카나"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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