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원왕
안원왕(한국 한자: 安原王, ?[2] ~ 545년 음력 3월)은 고구려의 제23대 국왕(재위 : 531년 음력 5월 ~ 545년 음력 3월)이다. 문자명왕의 둘째 아들이며 안장왕의 동생이다. 안장왕이 아들 없이 죽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안원왕
安原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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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리 사신총 벽화 | |
제23대 고구려 국왕 | |
재위 | 531년 5월 ~ 545년 3월 (음력) |
전임 | 안장왕 |
후임 | 양원왕 |
이름 | |
휘 | 보연(寶延) · 연(延) |
별호 | 곡향강상왕(鵠香岡上王)[1] 향강상왕(香岡上王)[1] |
시호 | 안원(安原) |
연호 | 건흥(建興) 연가(延嘉) |
신상정보 | |
출생일 | 미상 (498년 1월 전후) |
사망일 | 545년 3월 (음력) |
부친 | 문자명왕 |
모친 | 미상 |
배우자 | 정부인 · 중부인 · 소부인[1] |
자녀 | 양원왕 |
종교 | 불교 |
능묘 | 호남리 사신총 (추정) |
《일본서기》에는 곡향강상왕(鵠香岡上王), 향강상왕(香岡上王)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름은 보연(寶延)이며, 《위서(魏書)》와 《양서(梁書)》에는 연(延)으로 기록되어 있다.
생애
편집즉위
편집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문자명왕의 아들이며 안장왕의 동생이다. 《삼국사기》에는 안원왕은 키가 7척 5촌(173cm로 추정[3])이며 도량이 커서 형인 안장왕이 사랑하였으며, 안장왕이 아들 없이 죽자 동생인 안원왕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일본서기》와 《신찬성씨록》은 안장왕에게 복귀군(福貴君)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그 후손들이 코마씨(狛氏)와 오코마노무라치씨(大狛連氏), 노다씨(野田氏) 등의 성을 사용하면서 이 성씨들의 선조가 안장왕의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백제본기》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531년 3월에 안장왕이 시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시해나 정변과 같은 별다른 설명 없이 531년 5월에 안장왕이 사망하였다고만 기록하고 있어 《일본서기》의 기록과는 대치된다.
- 25년(531년) 겨울 12월 병신(丙申) 초하루 경자(庚子, 5일) (계체천황을) 아이노노미사사키(藍野陵)에 장사지냈다.
- 【어떤 책에는 '천황이 28년 갑인년(534년)에 죽었다'고 하였다.
- 그러나 여기에서 25년 신해년(531년)에 죽었다고 한 것은 《백제본기(百濟本記)》를 취하여 쓴 것이다.
치세
편집재위 기간 동안 북위와 양나라에 조공하며 남북조와 등거리 외교를 펼쳤으며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된 이후에는 동위에 조공하였다.[4]
533년(안원왕 3년) 정월, 왕자 평성(平成)을 태자로 책봉하였다.[4][5]
535년(안원왕 5년) 5월에는 남쪽 지방에 홍수가 나서 가옥이 유실되고 2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같은해 10월에는 지진이 났으며 12월에는 우레가 치고 전염병이 발생하였다. 이와 더불어 가뭄이 들자 사신을 파견하여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메뚜기떼의 습격으로 백성들이 농사를 망치고 굶주림이 계속되자 안원왕은 직접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살피고 위로하였다.[4]
540년(안원왕 10년) 9월, 백제의 성왕이 우산성(牛山城)을 포위하자 정예 기병 5,000명을 보내 물리쳤다.[4]
최후
편집545년(안원왕 15년) 봄 3월, 사망하였다. 시호를 안원왕(安原王)이라고 하였다.
《일본서기》는 《백제본기》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안원왕이 545년 12월, 자식들의 왕위 쟁탈전 중에 사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양서(梁書)》와 《남사(南史)》에는 안원왕이 548년에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
편집- 《일본서기》는 《백제본기》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545년 12월 안원왕이 병들자, 안원왕의 후비인 중부인(中夫人)과 소부인(小夫人)이 각자 자신들이 낳은 아들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전쟁을 벌였고, 중부인의 아버지인 추군(麤群)과 소부인의 아버지인 세군(細群)이 싸움을 벌이다가 추군이 승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기사 마지막줄의 '狛鵠香岡上王薨也.(박국의 향강상왕이 죽었다)'라는 부분의 해석을 두고, 안원왕의 호칭이 달라진다.
- "狛鵠/香岡上王/薨也(코마국의/향강상왕이/죽었다)"
고대 일본어에서 鵠과 國의 발음이 '코쿠(こく)'로 동일하며 '나라(國)'라는 동일한 의미로 쓰여져, 박국(狛鵠)은 고구려를 뜻하는 박국(狛國)과 같은 의미가 되므로 '박국(狛鵠, 고구려)의 향강상왕(香岡上王)이 죽었다'라고 해석된다. 이 경우 '향강상(香岡上)'이 호칭이 된다. 가마쿠라 시대에 간행된 《일본서기》의 주석서인 《석일본기(釈日本紀)》 비훈(秘訓)과 1669년 간행된 《일본서기》는 '향강상왕'이라 칭한다. - "狛/鵠香岡上王/薨也(코마의/곡향강상왕이/죽었다)"
'박(狛)=코마(こま)'로 발음되며 고(구)려(高麗=코마(こま))와 발음이 같다. 이 경우 '코마(狛=高麗)의 곡향강상왕(鵠香岡上王)이 죽었다'라고 해석되며 '곡향강상(鵠香岡上)'이 호칭이 된다.[6]
- "狛鵠/香岡上王/薨也(코마국의/향강상왕이/죽었다)"
- 《일본서기》는 안원왕의 뒤를 이어 왕위 쟁탈전에서 승리한 양원왕이 중부인(中夫人)의 아들이며 즉위 당시 8살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533년(안원왕 3년) 정월 양원왕을 태자로 책봉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모순된다.
-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모순된 기록과 관련하여, 한국 사학계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제1사료로 인식하지만 《일본서기》의 기록 또한 중요시하며 교차 검증하고 있다.[7] 《일본서기》의 기록을 토대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은 안원왕 말년의 내분과 정쟁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8]
- 이 해(545년) 고려(고구려)가 크게 어지러워 무릇 싸우다 죽은자가 2,000여 명이었다.
- 《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 “고(구)려가 정월 병오에 중부인(中夫人)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는데 나이 8살이었다.
- 박왕(狛王, 고구려왕)에게는 3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정부인(正夫人)은 아들이 없었다.
- 중부인(中夫人)이 세자(世子)를 낳았는데 그의 외할아버지가 추군(麤群)이었다.
- 소부인(小夫人)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의 외할아버지는 세군(細群)이었다.
- 박왕(안원왕)이 병들자 세군과 추군이 각각 소부인과 중부인의 아들을 즉위시키고자 하였다.
- 이로인해 세군측의 죽은 자가 2,000여 명이었다.”
- 라고 하였다.
— 《일본서기》 권19, 天國排開廣庭天皇
흠명천황 7년(546년)
가족 관계
편집기년
편집- 국보 제119호인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에 새겨진 '연가 7년(延嘉七年) 기미년'을 539년으로 비정하고 '연가(延嘉)'를 안원왕의 연호로 추정하기도 한다.
안원왕 |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 7년 | 8년 | 9년 | 10년 | 11년 | 12년 | 13년 | 14년 | 15년 |
서력 | 531년 | 532년 | 533년 | 534년 | 535년 | 536년 | 537년 | 538년 | 539년 | 540년 | 542년 | 542년 | 543년 | 544년 | 545년 |
간지 | 신해 | 임자 | 계축 | 갑인 | 을묘 | 병진 | 정사 | 무오 | 기미 | 경신 | 신유 | 임술 | 계해 | 갑자 | 을축 |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가 나 다 《일본서기》
- ↑ 형인 안장왕이 498년 1월에 태자가 되었으므로 최소 498년 1월 전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 ↑ 당시 척을 23cm 정도로 본다.https://labongbong.tistory.com/737
- ↑ 가 나 다 라 《삼국사기》 권19, 고구려본기 제7, 안원왕
- ↑ 《동국통감》 권5, 삼국기
- ↑ 이홍직, 「일본서기소재(日本書紀所載) 고구려관계기사고(高句麗關係記事考)」, 『한국고대사의 연구(韓國古代史의 硏究)』, 1971, pp.159~162
- ↑ 남무희, 「안원왕·양원왕대 정치변동과 고구려 불교계 동향」, 『한국고대사연구』 45, 2007
- ↑ 박기환, 「6·7세기 고구려 정치세력의 동향」, 『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 5, 1992).
전 대 안장왕 |
제23대 고구려 국왕 531년 - 545년 |
후 대 양원왕 |